영화 <셜록 2세>
버스터 키튼이 감독하고 주연한 <셜록 2세>은 특유의 유머와 그만의 스턴트가 버무려진 무성 흑백 영화이다. 탐정이 되고 싶어하는 영사기사인 키튼은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멋지게 고백하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다. 주머니에 있는데로 선물을 사갔지만 여자의 집에 찾아온 다른 사내에 의해 누명을 쓰게 된다. 다시 영사실에 돌아온 키튼은 꿈 속에서 영화 속 스크린으로 들어가 명탐정 셜록 2세가 된다.
<셜록 2세>의 훌륭한 점은 영화매체의 거의 초기작임에도(1924년 작) 그것이 영화 스스로를 철학했다는 지점에 있다.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며 영화 매체의 속성을 얘기하고 그것으로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자 하는지 이렇게 쉽고 명료하게 제시했다는 지점이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과장된 액션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또한 같은 상황을 여러 차례 관객에게 인지시키고 인식된 상황을 역전시킨다. 신문지가 발에 붙었다. 다른 발로 떼보지만 오히려 다른 발에 붙는다. 손으로 떼어본다. 손에 붙는다. 다른 손으로 떼어본다. 다른 손에 붙는다. 영화에 나오는 신문지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반복을 통해 인지시켰다. 누가 나오는 소리가 들었는지 뒤돌아본다. 손에 붙은 신문지를 길목에 올려놓는다. 돈을 세며 나가는 극장주의 발에 철썩 달라붙는다. 관객들은 언어에 좌우되지 않고 보는 즉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코미디를 만드는 일은 어렵다. 콜럼버스가 달걀을 집어 들고 퍽 하니 그 밑동을 깨고 세운 일화는 발상의 전환이란 것이 기존에 쌓아왔던 상식을 깨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코미디는 항상 그렇다.
극장주가 문 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주인공이 어떻게 알았나? 셜록 2세는 무성영화다.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극장주가 나오는 장면을 촬영해 끼워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존에 쌓아놓은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했나? 쉽다. 주인공이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무성영화는 음성이 없는 영상 위주의 영화다. 때문에 모든 설명은 액션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단순히 무성영화가 소리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시각적인 특성을 극대화시키는 하나의 미학이 된다. 때문에 토키 영화가 시작될 즈음에 토키 영화가 영화의 미학을 헤칠 수 있다며 영화인들 사이에서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꿈에서 스크린 속으로 점프해 들어간 주인공은 투사되는 배경들이 변환하는데도 연속된 것처럼 동일하게 움직인다. 단순히 슬랩스틱을 보여주는 코미디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이 쇼트들을 이어주는 주체가 되며 천천히 클로즈업된다. 이는 곧 캐릭터가 영화에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시퀀스가 된다.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주인공은 영화 속 영화가 시작되며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셜록 2세는 영화를 이야기한다. 클로즈업을 통해 영화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상상력은 극장주를 조수로 만들고 양아치를 진주 도둑으로 만든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명탐정으로 만들기도 한다. 또 엄청난 액션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주인공이 꾸는 꿈과 동일시된다. 영화는 재미있는 꿈, 공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키튼은 그저 그것에 멈추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배우를 모방한다. 영화는 현실의 주인공이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상호 관계성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공상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다. 무성영화의 특성과 코미디를 결합하면서도 영화의 가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