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견실 유리에 반사된 궁금증과 접견실 유리에 투과된 묘연한 진실. 시게모리의 딸이 흘린 눈물이 이 영화의 주제를 대변한다.>
<세번째 살인> 오프닝
재밌는 것은 이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분명히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오프닝에 해당하는 장면에서 말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분명한 진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영화 속의 사건을 카메라를 통해 관찰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중에 진실 그대로를 재현한 장면으로써 부정당한다. 더 정확히는 묘연해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카메라가 찍어내는 것, 그리고 찍어내지 못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구획하는 세계는 분명하다고 믿는다. 이미지는 물체를 시각적으로 담아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시종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텍스트화 시킨다. 일례로 시게모리의 딸이 도난 범죄를 저질러 시게모리가 찾아왔을 때 흘린 눈물을 보자. 카메라는 눈물을 흘리는 시게모리의 딸을 담는다. 하지만 곧이어 흘린 또 한 번의 눈물(그러니까 시게모리에게 그 모든 것이 연기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눈물은 진실된 눈물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녀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믿게’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또 한 번의 전화통화를 통해 시게모리의 딸이 시게모리에게 일종의 고백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다시금 사실 그 눈물이 그녀의 진실된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저 목소리만 들을 뿐. 이미지로 잡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미지가 있다고 하지만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미지인 것이다.
감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미지’라는 것을 다시금 이미지화시킨다. 미스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번복하는 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이에 있는 유리창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리창에 투과된, 유리창에 반사된 피사체만이 진실을 캐묻는 접견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사체를 반사시키고 투과시키면서 겹쳐낸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사실은 ‘유리창’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리창에 손을 맞대어 체온을 느끼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유리창을 통해 두 눈을 마주 보는 것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소통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뒤돌아 그 유리창을 스크린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정말 미스미가 살인을 저질렀는가? 그 또한 스크린이라는 접견실의 유리창을 통해 겨우 더듬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란 것을.
또한 접견실의 유리창이 접견인과 수감인간의 상호 안전장치로써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법체계라는 안전장치를 통해 삶을 재단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말한다.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것 같지만 결단코 한 발짝 넘어가 볼 수 없는 그 벽을 우리는 너무 신뢰하고 있다. 너무 신뢰한 나머지 접견실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진실을 유추한다는 것이다. 감독이 줄기차게 말하는 바 누구도 진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결국 쉽게 믿는다는 것, 또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진실에 도달할 때의 그 모든 과정이 쉽고 간편하게 편리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