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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오리 Aug 15. 2019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세계

영화 <팬텀 스레드>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피학과 가학이란 트라우마에 의해 빚어지는 비정상적 자기 인식으로 낙인 된다. 폭력에 대한 저항 혹은 순응적 태도를 취하며 환경에 대해 자기를 방어하는 하나의 기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의존하거나 지배하려는 인간의 경향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귀결적 논리다. 그 근간은 인간이란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환상이다. 그렇다. 그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인간’을 명시하고 구분할 때 다른 동물과 다른 특별함을 부여한다. ‘생명체’ 앞에 ‘지적’을 붙여 ‘지적 생명체’라고 부르며 우리의 존재를 독특하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를 구분하는 다른 말은 ‘포유류’이고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는 ‘동물’이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를 조금 더 복잡하게 꾸려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동물 세계의 원칙은 약육강식이다. 우리 또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뻔하고 당연한 말로 여겨지는 자연의 이치인데 우리는 이것을 문명사회의 결함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약자에 대한 동병상련 때문이다. 그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보면서도 내내 불편했던 내 심정이다. 엘마가 완고했던 우드콕을 무너뜨리고 나약하게 만들면서 재건축한 새로운 요새는 사실 그저 주인만 바뀐 노예의 집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 구조를 바꿀 수가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A에서 B로 옮겨가는 주체적이지 않은 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가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물과 동물 사이의 실, 그 관계성 우리는 어딘가에 복속되고 지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성은 우리가 불합리하게 여기던 폭력의 낯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관계의 감춰진 면모다. 영화는 폭력과 사랑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엘마가 대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의 흐름에 따라 엘마의 면모를 종합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입체적인 인물인지 알 수가 있다. 우드콕은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서 남에게 분배하고 하루의 시작을 망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모든 일에 예민하다. 그래서 타인을 조정하고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는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 엘마는 다르다. 파티에 가고 싶으면 가면 되고 등산을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엘마는 자신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통제할 필요가 없으니 타인에 의해 제한당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면 그뿐이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지배적인 기재는 상대방을 복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지만 그 근간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스스로를 속박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레이놀드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상적 여성상인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상실감. 그래서 엘마가 레이놀드의 어머니의 대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는 틀림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레이놀드는 엘마가 주는 독버섯을 스스로 먹었다는 것. 그 순간에 그가 깨고 나온 알껍질은 순응적인 복속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것. 복속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완전한 사랑의 형태로서의 복속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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