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
차가운 사무실에 속옷 바람으로 서있는 꼬마 남자아이를 줌인하며 영화는 시작합니다. 한 남성이 아이의 이를 보며 이 소년의 나이를 가늠합니다. 출생증명서도 신분증도 없는 생년월일도 알지 못하는 이 소년의 이름은 자인(자인 알 라피아), 감독은 배우의 실제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자인은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면서 말이죠.
자인의 과거를 역추적하면서 우리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속에서 살아가는 자인과 사하르(하이타 아이잠) 그리고 라힐 (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등 인물들이 처한 가난과 아동학대, 불법체류의 문제 등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광경은 처참하고 끔찍합니다. 둘러서 말하지 않는 직구 같은 자인의 대사들을 들으며 관객들은 쉽게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직구가 아니라 교묘한 변화구입니다.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들과 이 영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분들이 대치하고 있는 지점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부분으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이 아동인권에 대한 대담을 사회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영화 내부의 인물들을 가학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고통 포르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감독 자신이 영화를 통해 이루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아동 인권’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 시키고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영화의 네러티브, 플롯, 인물, 카메라, 음악 모든 것이 이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에 따라 영화관 바깥에서 벌일 수 있는 담론의 방향을 한쪽으로 고정시킵니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담론이 과연 능동적인 관객을 생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레바논’ 지역의 고통받는 아이들의 인권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영화는 그 고통의 책임을 어른인 ‘부모’에게 묻습니다. 왜 감독은 그 책임을 부모에게서 찾는 것일까요? 과연 아동인권의 문제는 부모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영화의 후반부 교도소에 갇혀있던 자인이 TV에서 아동학대에 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것을 봅니다. 자인은 그 보도국으로 전화를 걸어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그제야 제도권의 시스템은 작동합니다. 그로 인해 자인은 재판을 받을 수 있었고 요나스는 구출됩니다. 다분히 작위적인 결말임에도 불현듯 나타난 제도권은 모든 사태를 수습합니다. 감독이 표현한 제도권은 자애롭습니다.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으로 사태를 봉해버립니다. 우리에게 시스템에 대한 질문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던가요? 영화의 초중반 속에서 시스템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부모와 어른들에 의해 아동이 착취당하고 유린되는 동안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아예 그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 수가 없었죠. 이러한 병치들은 그야말로 우리를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그 가능성들을 뭉그러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부모’와 ‘어른’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향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은 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에게 즉, 각 개인들에게 ‘어른들이여 아동인권을 위하여 각성하라’ 라며 계몽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발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현시대에서도 계몽적인 발언은 때에 따라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러한 발언을 해내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을 꺼트렸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선택과 집중을 위한 것이라 해도 그로 인해 납작해진 이야기는 스스로 ‘한계’를 품어버린 꼴이 되는 것입니다.
감독이 납작하게 눌러버린 것은 시스템에 대한 사유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요소인 자인이라는 캐릭터도 목적에 맞게 잘 다듬어진 하나의 도구에 불가합니다. 왜냐면 이 캐릭터는 관객들의 미움을 사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의 미움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관객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라힐의 집에 들어간 자인은 라힐이 가지고 있는 돈뭉치를 발견합니다. 라힐이 아들과 함께 레바논에서 머무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류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브로커에게 체류증을 불법으로 구입하려고 하는데 천오백 달러라는 거금이 필요합니다. 머리까지 팔아가며 돈을 마련한 라힐은 돈뭉치를 침대 다리에 숨겨둡니다. 자인은 그것을 몰래 확인합니다. 하지만 자인은 그 돈을 훔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힐이 불법체류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라힐의 아들인 요나스를 지키기 위해서 그 돈을 사용합니다. 자인은 불법으로 약을 팝니다. 범법행위지만 관객들은 자인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나스를 지키기 위해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인은 끝까지 요나스를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집에서 쫓겨나게 되자 그렇게 모은 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요나스를 브로커에게 넘깁니다. 그리고는 신분증명서를 얻기 위해서 부모의 집으로 갑니다. 여기서 자인은 사하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사하르를 죽게 한 아사드를 칼로 찌릅니다. 이렇게 자인이 저지른 범법행위들은 도덕적으로는 옳지 않을지라도 전후 사정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인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행위들입니다. 자인의 모든 행위들은 그 인정 위에서 용인됩니다. 우리는 이 캐릭터를 미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히려 동정하게 되죠.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의인으로 읽혀집니다.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이타심을 잃을 수 있는 척박하고 무시무시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의를 잃지 않는 굳건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딜레마도 가지지 않는 아주 손쉬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토대 위에서 관객들이 하고 있는 동정과 연민은 과연 진짜 동정과 연민이라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감독은 관객의 사랑을 얻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서의 캐릭터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을 뿐 레바논에 실존할 수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캐릭터를 도구화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도구화된 인물을 바라보게 되는데 감독은 이 영화의 사실성을 통해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첫째, 이 영화는 사실적인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잔가지들을 치고 큰 줄기를 키우자는 전략적인 선택이 가득한 영화입니다. 둘째, 사실적인 것과 사실성은 다릅니다. 현지에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아동들을 직접 배우로 섭외했다고 하더라도 감독이 자신의 의식을 투영한 인물을 직접 연기하였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사실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영화를 사실적으로 만들기보단 영화가 사실성 있게 보이도록 하려는 영화 외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화는 사실적일 순 있어도 사실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영화가 플롯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란 필연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기승전결이라는 짜임새 안에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고 또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그런 영화의 성질을 간과한 체 프레임 밖에서 살아 숨 쉬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은 영화의 윤리를 져버리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이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영화 바깥의 담론을 위해서 도구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내부에서는 영화의 성취를 상실하게 됩니다. 필요에 따라 이야기 자체는 납작해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영화들, 특히 할리우드의 많은 상업 영화들은 이야기의 얼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하는 닫힌 결말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화 중에서도 우리가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영화들은 납작하더라도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납작한 영화가 만들어내는 납작한 담론은 아마 오래 기억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