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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매일성장통 May 12. 2020

당신의 남편은 어떤가요?

-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는 정녕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 - 세상에 대화가 통하는 남자는 없다?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엄청난 고민을 했었다.

사실 그 고민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게 이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결혼이라는 명제를 앞에 두고 난 나의 가치관과 결혼에 대한 개념,

미래에 대한 기대 등 모든 것들에 대한 재정의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상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확신, 혹은 운명적 만남 등등이 아니었다.

어차피 세상에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는 게이일 수 밖에 없다는 정말 웃픈 신문기사와,

결혼은 정말 어마어마한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해야 하는 인생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결정적 한 방이 아니라,

어차피 그 놈이 그놈인데 한번쯤 해보는 거지라는 마음으로 대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고 했음에도 어쩌면 나는 아직도 어느 정도의 상대에 대한 기대,

결혼에 대한 환상 등을 버리지 못했었나 보다.


1.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적으로 격양되지 않고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느꼈고를 말하고, 너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듣고,

아 그럼 우리 서로에게 오해가 있었으니 이제 우리 이런 문제를 또 겪게되면 이렇게 해결하자.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상적인 대화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할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는 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

특히 서로를 많이 알고 가깝다고 생각할수록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대화의 말이 아니라 표정이나 말투, 뭔가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느껴지는 느낌 등등의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즉 아무리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자신해도,

상대는 이미 떨리는 목소리와 시선회피, 어두워진 표정 속에서 상대가 화가 굉장히 났다는 걸 인지하고

문득 급작스럽게 경고등이 머리에 켜지며,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왜 나에게 저토록 화가 났단 말인가로 밖에 인지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시도하고자 했던 나 대화법

즉 "나는 이래서 기분이 이랬어"의 대화는

"내가 이렇게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는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다 문제야"는 말로 상대의 귀에 들리게 되고

내가 하는 말의 내용은 하나도 그 사람에게 도달하지 않게 된다.

결국 상대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엄청 노력하고 있는데, 나는 정말 좋은 남편이 되고 싶은데, 모든 건 다 내탓이고 내 잘못이고

나는 결코 이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렵고 힘든거야. 나도 힘들다고."


결국 상대의 귀는 이미 닫혀져있고, 머릿속의 경고등은 어서 상황을 종료시키라고 울려대고

대화는 더 이상 진행조차 되지 않는다.

여러번의 이런 과정을 통해 상대는 내가 보여주는 어떤 것들보다

그간 자신이 만들어낸 상대에 대한 이미지로 상대를 보게 되기까지 한다.

"왜 저렇게 바라는 것도 많고, 나에 대해 평가만 하려하고, 감정적이고, 이제 또 울겠군 울겠어.

이런 상황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어."


2. 상대에게 느끼는 나의 서운함은 즉시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표현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다. 이게 내 지론이었다.

내 의견, 내 감정은 얘기를 해야 상대방이 알아줄 수 있으며,

하물며 인생의 동반자라면 내가 어떨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떨 떄 서운함을 느끼는지,

꼭 집어 얘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나에 대한 데이터를 제대로 축적할 수 있으며, 그 데이터가 쌓여야 상대에 대해 더 알 수 있고,

그 세월이 축적되어 서로에 대한 여러가지 모습을 알아가는 게 부부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 감정을 바로바로 얘기하듯, 상대방도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왜 서운한지,

혹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왜 서운했는지, 왜 화가 났는지. 그냥 넘어가는게 , 대충 넘어가는게 참 싫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이 반응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내 나름 아주 미묘하게 풍기고 있다는

나의 서운함, 나의 화, 나의 짜증 등을 실제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사실만으로도 무언가 자신의 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런 상황들이 당황스러웠고,

그 당황스러움이 결국 화로 치밀어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론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다.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가 아니라 자신이 인정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 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점이 서운했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느껴지는 상대의 감정에 결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이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화나게 했는데?"

"네가 먼저 화를 냈잖아.... ??"  


3. 서로에게만큼은 칭찬과 격려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은 서로에게 절대적인 지지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로 나가면 상처받고 피흘리는 일상들일테니, 집으로 돌아와서만큼은 무조건적인

"괜찮아, 그럴수도 있지, 별거 아니야"

라는 말로 위로받고 싶었다. 그런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여러가지 일들, 사소한 실수에서부터 중대한 결정의 오류까지.

너무나 많은 어쩌지의 순간들에서..

어떻게 하지. 나 도대체 왜그러지 라고 조바심 내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만큼은

"다들 그래. 너만 그런것 아니야. 별거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결코 누구나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는 아니었나 보다.


별거 아닌 사소한 일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만났다.

밖에 나가서 같은 실수를 하면 안되니까, 굳이 일일히 알려주고 지적해주는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이 남자.


그래서일까. 남녀간의 사랑이 결코 일방적인 희생적 사랑이 될 수 없듯,

그런 남자에게 나 역시 칭찬과 격려가 나가지 않았다.


가족임에도 굳이 나의 허물을 지적하는 그의 모습에 상처받아

오히려 어떤 모습도 칭찬해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말투가 그럴뿐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나에게 말투는 너무나 중요한 표현의 문제였다.


절대적인 지지, 칭찬, 위로의 말투.

어쩜 난 너무 많은 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많은 부부들이 서로에게 칭찬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방송에서 수많은 상담사들이 주장해도,

서로의 단점이 더 크게 보이는 걸 어쩔 수 없어 헐뜯고 피흘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실, 달콤한 말만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냉철한 현실적 비판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판이 오히려 가족이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의 차이일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결국,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헛된 기대따위 없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나 역시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있었고,

그것이 나만의 정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싸우고 서운해하는 과정을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기 전, 재미삼아 궁합이라는 걸 본적이 있다.

그 사람의 사주를 앞에 두고 한동안 말이 없던 점쟁이는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너무 잘맞는 천생연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 같이 못살 궁합도 아니라고.

처음엔 두려움이 앞섰다. 이제 무르기도 힘든 상황인데. 뭔가 천생연분의 연이길 궁합으로나마 확신을 얻길 기대했었나보다. 그리고 그 얘길 들은 내친구는 아주 대수롭지  않게 툭 이 말을 던졌다.

다 그렇게 살아.


어떤 사람을 만나든 완벽한 나의 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 이후에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결혼전에 어떻게 상대를 다 파악하고 판단할수 있을까.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본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다만 치열하게 파악하고 싶은 탐구대상이 생겼는데 그게 나의 기존에 있던 가치관과 이해의 바운더리에서 해결되지 않아 이제 그 탐구의 화살을 상대가 아닌 내자신으로 돌려야하지 않을까 한다.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라는 옛어른의 말이 진리라면

그 사람과 내가 어긋난 포인트에서 저 사람이 왜 그랬을까가 아닌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부터 탐구하는 것이 훨씬 쉬운 접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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