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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거나 불량품이거나

나는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by 아난다

엄마가 되기 전 나는 내가 상당히 똑똑한 줄 알았다. 공부만 잘하는 똑똑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지혜 역시 나무랄 데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행복한 삶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문턱들을 큰 어려움없이 수월하게 넘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 둘을 낳고서야‘노처녀’친구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혜안’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아니 살짝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이 중요한 정보를 니들만 알고 있을 수 있니? 기집애들, 니들은 친구도 아니야. 친구가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어떻게 한 번 말려주지도 않고 내버려 둘 수가 있냐구???”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낳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연애도 지치고 지칠 무렵 한 결혼이니 결혼까지 물러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지만, 출산만은 1초도 다시 생각할 이유가 없을 만큼 완. 벽. 히 후회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이리 예쁜 아이들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냐고? 바로 그 부분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이렇게나 사랑스런 아이들이 어쩌자고 나 같은 엄마에게 태어났는지 미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낼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가 않았다.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멀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이야기다. 남성이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데 반해 여성은 그 어떤 노력 없이도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자신 안의 마력을 꺼내 쓸 수 있다는 거다.


당시의 내게 신화, 아니 조셉 캠벨은 어디에서도 털어놓을 수 없던 내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던 자애롭고 따뜻한 스승의 이미지였다. 삶의 새로운 국면에서 허둥대고 있던 있는 나에게 그가 각 문화권의 신화 속에서 추출한 고유한 패턴인 ‘영웅의 여정’은 때마침 나타난 반가운 안내자처럼 느껴졌다. 그의 안내를 따라가선 나도 언젠가는 무사히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은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을 수있게 하는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런데 그의 가이드가 오직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니.


아무리 뜯어봐도 내게는 전통적인 여성성에 해당하는 성분이라고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도무지 내게 생명을 품어 기르는 대지의 마력 따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불량품이 맞았던 거구나! 신의 실수가 분명하구나!’


스스로를 상당히 괜찮은 존재라고 믿고 있던 우등생이 별안간 요구하는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면키 어려운 지진아로 전락한 상황은 그야말로 모멸 그 자체였다. 타고난 결함이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파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가능성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눈치챘는가? 실패나 좌절에 대한 심각한 면역결핍 장애를 가진 수퍼 유리멘탈, 맞다. 그렇다면 그런 내가 어떻게 그 엄청난 암흑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놀라운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스스로를 ‘타고난 엄마’로 느낀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모성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파란만장한 시행착오를 통해 ‘엄마라는 역할의 핵심 기능은 엄마의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될른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통해 세상에 온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책임감이야말로 캠벨이 말한 마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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