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이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방식

아난다의 열두번째 화요편지

by 아난다

안녕하세요? 화요편지 애독자 여러분! ^^


한 주간 어찌 지내셨나요? 일주일 당신에게는 어떤 지혜가 머물렀나요?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요? 당황스러우시다구요? ㅎㅎ 이해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신비롭지 않나요? 한 때는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엄마라는 역할 속에서 또 한 주를 살아낼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놀랍지 않나요? 오늘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엄마로 무르익어가는 변신의 신비. 그럼 시작해볼까요? ^^


엄마가 되기 전 저는 제가 상당히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공부만 잘하는 똑똑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지혜 역시 나무랄 데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행복한 삶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턱들을 큰 어려움없이 수월하게 넘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 둘을 낳고서야 ‘노처녀’ 친구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들의 ‘혜안’이 부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아니 살짝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이 중요한 정보를 니들만 알고 있을 수 있니? 기집애들, 니들은 친구도 아니야. 친구가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어떻게 한 번 말려주지도 않고 내버려 둘 수가 있냐구???”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낳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연애도 지치고 지칠 무렵 한 결혼이니 결혼까지 물러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지만, 출산만은 1초도 다시 생각할 이유가 없을 만큼 완. 벽. 히 후회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이리 예쁜 아이들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냐구요? 바로 그 부분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이렇게나 사랑스런 아이들이 어쩌자고 나 같은 엄마에게 태어났는지 미안해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낼 자신이 도무지 생기지가 않았습니다.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삶은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입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멀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이야기입니다. 남성이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데 반해 여성은 그 어떤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자신 안의 마력을 꺼내 쓸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의 내게 신화, 아니 조셉 캠벨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던 내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던 자애롭고 따뜻한 스승의 이미지였습니다. 그가 각 문화권의 신화 속에서 발견해낸 공통된 패턴인 ‘영웅의 여정’은 삶의 새로운 국면에서 허둥대고 있던 있는 저를 위한 통과의례의 매뉴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무사히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은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의지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매뉴얼이 오직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니. 아~.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제게서 여성에게는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는 ‘생명을 품어 기르는 대지의 마력’ 따위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니 생물학적으로야 준비된 엄마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딱 그것뿐이었습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하고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나는 불량품이 맞았던 거구나! 신의 실수가 분명하구나! ’


알을 깨고 나온 순간, 뭔가 잘 못되었음을 알아차린 미운오리새끼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상당히 괜찮은 존재라고 믿고 있던 우등생이 별안간 요구하는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면키 어려운 지진아로 전락한 상황은 그야말로 모멸 그 자체였습니다. 타고난 결함이라면 언젠가는 ‘백조’로 변신할 수 있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눈치채셨나요? 실패나 좌절에 대한 심각한 면역결핍 장애를 가진 수퍼 유리멘탈,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제가 어떻게 그 엄청난 암흑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더 놀라실까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저는 스스로를 ‘타고난 엄마’로 느낍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여성성을 재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에이, 설마요.


‘엄마’ 역할의 핵심기능은 엄마의 존재 자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면 충분한 대답이 될른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희망이라곤 한 조각도 찾을 수 없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만든, 자신을 통해 세상에 온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책임감이야말로 캠벨이 말한 ‘마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엄마’로 살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덕분이기도 했을 테구요.



earth.jpg?type=w740


그리고 또 하나. 엄마가 되고 나서 거쳤던 수많은 좌절과 방황, 시행착오들이야말로 여자를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최적의 교육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산출이 적은 척박한 토양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생살을 찟듯 갈아엎어지고, 다른 생명체의 배설물을 뒤집어쓰는 과정을 통해 천천히 자신이 품은 생명체를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옥토로 다시 태어나는 대지처럼 엄마 역시 ‘아이를 기르는’ 바로 그 시간을 통해 서서히 엄마로서 무르익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캠벨이 말하는 '저절로'란 한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였던 모양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숙명을 지우는 것이야말로 삶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