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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May 15. 2021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진정한 '사랑'?

오직 나를 위한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

직장을 나온 지 1년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쳤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이제는 뭔가 시작해야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퇴직 직후에는 감히 기대도 할 수 없었던 변화였다. 물론 반가운 변화였다. 문제는 '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였다.


꼭 이런 마음일 때 스승을 만났다. 스승의 안내를 따라 한 발짝씩 걸으며 막막하기만 하던 내 마음의 밀림에서 길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 길 위에서 평화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의 레이스'라 불릴 정도로 혹독한 연구원 과정이라도 다시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 때와 달라져 있었다. 먼저 연구원에 지원하던 당시와는 달리 나에게는 이미 지켜야할 운명의 현장이 분명히 있었다. 바로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나를 움직이게 했던 그 일, 그러니까 '삶을 바꾸는 일'이 단기성과를 기대하고 의욕만으로 덤빌 종류의 프로젝트가 아님을 절감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아무런 의심없이 믿고 따르던 스승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불안해 하며 이것저것 뒤적이다 수년전 내가 만들어 띄워놓았던 공지문을 발견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하 '아기시')은 스승과 함께 했던 연구원 과정에서 체험했던 자기변형의 원리를 동료엄마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선택의 기회가 남아있는 휴직기간에 내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 검증해보고 싶어 시도했던 실험이기도 했다.


설마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공지를 내고 나니 뜻하지 않게 신청자가 모였고, 더더욱 뜻하지 않게 그녀들이 보여주는 폭발적인 반응에 진행하던 내가 오히려 깜짝 놀랄 정도였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눈에 띄게 평화로워진 그녀들을 보며 우쭐해지기도 했다. 내가 대체 뭘 한거지? 타고난 건가?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마냥 즐길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흐뭇한 일이었지만, 엄마들의 엄마 노릇을 하느라 정작 아이를 돌볼 기력이 없을 정도인데다가, 멀쩡한 직장 놔두고 언제까지 자원봉사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조바심은 그보다 더 세차게 나를 흔들었다. 여기에 이런 번잡스런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는 추가의 노력까지 해야 했으니 '아기시'는 내게 기쁨이기보다는 버거움으로 기억되는 장면의 하나였다. 그래서 미래에서 슬쩍 지워버린 그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쩌면 '아기시'는 바로 지금의 나를 위해 미리 만들어 두었던 프로그램이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조직을 떠나 자유인으로서의 새 출발을 앞두기도 한데다 마냥 어리던 다섯 살 훈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아기띠에 넣고 다니던 영이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이쯤에서 엄마로서의 답안지도 한번쯤 업데이트 할 때가 된 거니까.’ 그렇게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한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뭐가 그렇게 널 힘들게 하는 거니? 진짜로 살고 싶은 삶은 어떤 거니? 그 삶을 만나는 걸 망설이게 하는 건 뭐니?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면 그 삶을 위해 지금 여기서 뭘 할 수 있겠니?' 등등 아무도 물어주지 않기에 대답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질문들에 온 마음을 다해 답하는 시간을 보냈다. 한 사람의 간절한 참가자로 아기시를 따라가면서 그때 그녀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현자'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내 이야기를 판단없이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존재면, 그로 충분했다. 마음 놓고 내가 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면 충분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몸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부끄럼없이 씻어낼 수 있었고, 허위를 걷어낸 내 존재 본연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 모습에 걸맞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미 있는 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거다.


왠지 모를 끌림으로 내 안에 다 있는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엮어 밑줄 긋고 메모해가며 읽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읽듯. 그리고 나니 내 이야기라고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않던 책 속의 그녀를 위한 길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자기 자신과의 연결을 잃은 사람들이 그 연결을 회복하는 것을 돕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감히 후배 연구원들의 안내자 역할을 자처할 용기를 내고, 또 이를 감당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책에서 얻은 확신 덕분이었다. 한 발을 내딛으니 또 다음 걸음을 위한 길이 열려왔다.


그렇게 그 책을 쓰면서 발견한 길 위에서 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일견 막연해 보이는 열망을 어쩌지 못하는 스스로를 묵묵히 믿고 기다려주었던 그 힘이야말로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생명력을 다시 깨워내는 '진정한 사랑'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다시 말해 나비가 되기 위한 '고치의 시간'이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수용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을 기르는 수행의 시간이며, '나비'란 비로소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된 존재를 이르는 말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한 책쓰기'는 그 수행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주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은
고통의 뿌리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길이 된다.
그 책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줄 것이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것이다.

틱낫한 스님의 <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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