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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Dec 27. 2023

영화감상문을 빙자한, 겉모습에 관하여

Catch me if you can

대학생 때, 같은 영화를 몇 번씩이고 돌려보는 친구가 있었다. 이미 본 영화를 영화관에서 다시 보기도 한다는 그 녀석이.. 도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순수하게 궁금했었다. 차라리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돌이켜보면, 학생 때는 다소 유별나게, '앎'에 대한 집념이 강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머릿속으로 집어넣으려 했고, 이미 경험한 것은 '완료'되었다고 여겼다. 지금에서야 그러한 배움의 방식이 강박적이었고, 삶의 많은 것들을 앗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영화에서까지도 새로운 것을 탐닉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조금은 짠하긴 하다.



잘 만든 영화를 시간 간격을 두고 다시 보는 것은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결의 재미를 주더라. <Catch me if you can>이 그랬다. 워낙 화려한 영화라 참 재밌었는데, 재미라는 수식어로 퉁치기에는, 본질을 건드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에, 개인적으로 재미를 느꼈던 부분과 영화를 통한 고찰로 나누어 끄적여보았다.



1. 재미 요소 - 소비와 비상함



디카프리오의 얼굴과 연기력만으로 영화는 재밌어진다. 2시간 동안 동화책 읽으면서 흥미로운 제스처나 몰입하는 표정만 지어도 웬만한 영화보다 흥행하겠지. 그럼에도, 배우를 너머 '배역' 자체가 매력적이고 스토리가 흡입력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흥청망청 소비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스토리이다. 요즘 아이들은, 그다지 뛰어다니지도 않고 휴대폰 쳐다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



(난 유년시절 경찰과 도둑을 할 때, 전속력으로 도망치다 벽돌에 머리를 처박은 적도 있으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질주한 적도 있었다.)



아마 이 친구들은 유튜브 프리미엄 때문에 광고를 아예 안 보거나, 스킵하는 법만 알지 광고 한 편을 제대로 보는 일이 드물 것 같다. 라때는 TV를 볼 때, 광고를 보는 것 역시도 콘텐츠 소비 중 하나였다. 덕분에 어릴 때 광고를 동요처럼 따라 부르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자발적으로 제품의 충성고객이 되며, 자연스럽게 갖고 싶다는 '소비'의 욕구가 내재화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막상 사면 정작 필요도 없는데 가끔은 그저 원 없이 돈 써보고 싶다는, 내재화된 소비욕구가 작동할 때가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처럼 미친 듯이 소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우와.. 하고 부러움도 있지만 대리만족을 크게 느끼는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배역이다.



디카프리오는 학생 기자로 위장해 단 몇 번의 인터뷰로 파일럿을 흉내 내고, 의학 드라마를 보고 의사 행세를 곧 잘 해낸다. 누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고 의사를 흉내 낼 수 있을까? 영화의 킬링 포인트 중 하나는, 속된 말로 '가라'치지 않고 디카프리오가 정면승부로 2주 만에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이다. 배움을 멈추면 도태되는 현대사회에서 저런 치트키 급의 비상함은 찰나의 열등감 뒤에 대리만족과 선망 등 마음 깊숙이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이었음에도 말이다. 이점을 작가도 잘 알고 있었는지, 톰 행크스는 몇 번에 걸쳐 어떻게 변호사 시험을 2주 만에 통과했냐고 캐묻는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서야, 디카프리오는 담담하게 '사기 아니었다. 그냥 2주 공부해서 친 거다'라고 툭 던지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한다. 개인적인 취향인데, '잘남'의 화룡정점은 역시 쿨함으로 방점을 찍는 것 같다.


2. 재미 후, 여운 - 겉모습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에 유독 집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50대로 보이는 앞머리가 까진 사람을 보고, 잠깐 속으로 분노를 했다가, 이내 사회적 통념 때문에 저 사람이 아저씨로 인식되는 것이지, 실제로 임신을 한 30대 여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미친 시기가 있었다.(물론 잠깐 생각만)



이건 또 다른 일화인데 예전에, 한 번은 학부 때 조모임이 끝나고 여성 학우에게 혹시 담배 피우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관심 있었던 거 아니다) 그 친구의 흡연 여부를 모르는 상태였고 흡연자들끼리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경험 및 관찰에 따르면, 흡연자들은 비흡연자에게는 다소 배타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곤 한다. 같이 몸을 망치고 있다는 동질감이 근저에 깔려 있는지, 피던 놈이 갑자기 안 핀다고 하면 괜스레 섭섭하다. 어쨌거나.. 그 친구가 비흡연자라고 판단할 수 있는 맥락이 없었기에, 물어보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는 것이, '어 쟤는 여자니까 안 피겠지'하는 사고방식이 되려 편협한 것 같아, 대뜸 물어봤다. 비즈니스 미팅이 끝나고 거래처 사람에게 '혹시.. 담배 태우시냐?'라고 공손하게 묻는 것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당황해하며 '제가 담배 피우는 여자로 보이세요?'하고 경멸조로 대답했다.



사회화 과정을 한창 겪고 있던 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理想)과 아직 변화되지 않은 현실 사이에서 처세를 적절하게 하지 못할 때가 잦았다. 책 한 권 읽고 '~주의'를 탑재한 사람처럼, '겉모습만 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참 무례한 것이다'라는 하나의 생각만으로, 일반적인 '경향성'을 엮어 생각하지 않는 실례를 범했다.



우리는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단정 짓는 것이 터무니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되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용하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각자 겉모습이라도 그럴싸하게 갖춰, 비록 터무니없을지언정, 편리해지는 삶을 택해가는 것 같다.



'각자의 겉모습'을 비단 외모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비치는 모든 것들로 확장해 보자.



좋은 차를 타고 도로에 들어서면 운전이 영 수월하다는 사실과, 좋은 간판의 학교나 대기업 명함을 내밀면 나를 설명해야 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고, 외모의 어느 부분이 콤플렉스라면 미의 기준을 바꾸거나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 가끔은 시술을 받고 코를 세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준 자체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그저 수많은 겉모습의 기준 중 하나를 골라 그 기준의 좋은 쪽에 자신을 편입하는 쪽을 택한다.



나도 사실 그래서 운동, 구체적으로는 헬스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사상이 섹시할 때 비로소 '알파'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현실은 사상이 빈약해도(좀 덜 날카로워도), 벌크 업하고 미친 근육을 탑재하는 게 남자들의 존중을 받고 여자들의 마음을 산다. 상대가 내 사유하는 힘을 알아주기를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결국 광배 넓히고 윗가슴 나와서 옷태가 나는 게 더 알아봐 주더라.


3.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읍시다



영화 속 '유니폼'은 겉모습의 상징이다. 디카프리오는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가 천지차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파일럿을 사칭한다. 그리고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건실할 것'이라는 기준에 자신을 편입시킨다. 이밖에도 특정 제품의 상표를 떼어내어 지갑에 보관하고 있는 모습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겉모습에 병적으로 치중하는 삶의 궤적들이다. 도망 다니며 유유자적하던 디카프리오는 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나 이런 자신을 멈춰달라고 말하는데, 그때의 모습이 마치 자신은 이미 통제력을 잃었으니 'Catch'해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눈을 쳐다보며 '결국 너는 멈출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극 중 인물의 정도가 극단에 치우친 것뿐이지, 우리가 사는 방식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외모에서 확장시킨 범위의) 겉모습의 수많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삶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를 좀 먹는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기준에는 미달할지언정 단 하나의 충족된 기준만 있다면.. 이로써 자신을 구성하고 이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배척하며 자신을 보호한다.



A라는 사람은 카푸어지만, 적어도 '차'는 좋은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좋지 않은 차를 타는 B를 '차'라는 기준에 편입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B는 가진 것이 '대학' 타이틀 밖에 없기 때문에 '대학'을 나오지 않은 C를 가치 절하하고, 얼굴이 '잘생긴' 게 전부인 C는 차로 이성을 꼬시려는 A를 자기 아래로 본다.



단순화시킨 고리들이지만 내가 보고 있는 사회의 한 단면은 이렇다. 각자 독립된 기준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상이한 기준을 들이밀며, 야금야금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는다. 이 얼마나 애석하면서도 짠한 모습이지 않은가.



이 악순환은 어디서부터 멈춰야 할까? 개인적인 해답은,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이 하나하나 풀어나가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필력 개쩌는 국문과 형이, 시험기간에 페이스북에 글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면, '여러분 우리 다 같이 중간고사 범위 절반만 공부합시다. 그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요.' 집단행동을 하자는 거다.



영화 말미에 톰 행크스는 다시 한번 도망을 결심한 디카프리오를 쫓아 가지만 '뒤를 돌아봐, 결국 너랑 나 밖에 없어, 더 이상 아무도 너를 쫓지 않아.' 말하며 그를 놓아준다. 결국,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술래잡기 자체를 그만두면 된다는 것이다.



OECD국가 중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나라, 자살률이 1위인 나라를 마치 특정 세력, 집단 등 유형의 적이 있는 것처럼 상정하고 그들을 타파해야 되며, 제도나 개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들이 술래잡기를 멈출 때가 아닐까?



결국 우리 사회에도 점진적으로 개인주의가 정착하면서, 자기 영역들을 구축해 나가고, 이런 비교 문화도 점진적으로 사라지겠지만..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될지언정, '여러분, 우리 진짜 이런 거 그만하면 안 돼요?'하고 서로 갉아먹는 비교 그만하자고 순진하게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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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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