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van greene Nov 24. 2023

생일을 맞이한, 삶에 대해 끄적임.


1. 불완전한 질문 - ‘왜 살지?’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우리 모두 본인 선택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왜 살지’라는 질문은, 이 점을 간과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태어나 ‘졌’으니까 사는 거지, 자유의지로 이 세상에 나타난 사람은 없다. 반대로, ‘왜 죽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면, ‘왜 살지’에 대해서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죽을 이유도 마땅히 없었다.

2023년 8월 6일. 21시(GMT+9) 경, 311,189명이 태어났으며 140,810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탄생의 기쁨이 버겁게 다가오고, 죽음의 슬픔이 겹겹이 쌓여 사무치는가? 사실 별다른 감흥이 없다. 이는 목숨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 탄생과 죽음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개인의 탄생과 죽음은 주변인들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내가, 구태여 ‘삶’ 앞에 ‘왜’를 개입시켜, ‘왜 살지’라는 질문으로 마음속에 분란을 조장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살아감’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과녁도 없는 곳에 활을 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정확히 겨냥해서 쏴도, 애초에 그곳에 과녁이 서있지 않았으니, 1점, 9점, 10점, 6점.,..처럼 되돌아오는 점수도 없다.


2. 정확한 질문 - ‘어떻게 살지?’


삶의 주도권을 잃으면, ‘왜 살지’라는 질문으로 수렴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누구나 그러한 시기가 있다. 하지만 삶은 응당 ‘왜’가 아닌 ‘어떻게’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 살지?’는 ‘나 무료해’, ‘힘들어’로 치환하면 되지, 우리가 머리 맞대고 대화 나눌 접근은 아니다. 반면, ‘어떻게 살지’로 접근하면 꼬리 질문들이 파생되기 시작하며, 우리가 논의할 수도 있다.


‘어떻게 살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뭐지?’, ‘그럼 오늘 나의 하루는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하지?’ ‘누구를 만나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지?’ => 이게 맞다.(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고방식)


누군가는 ‘어떻게 살지’라는 질문을 던져도 윤곽이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십중팔구 경험의 총량이 충분치 못해서이다. 이를테면,


a.‘라면을 어떻게 끓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스프부터 넣을지, 면부터 넣을지에 대한 각자 기준이 있다. 왜? 경험의 총량이 충분하니까.(난 물부터 넣는다ㅎㅎ)

b. 산미가 있는 아메리카노가 좋은지? 고소한 아메리카노 좋은지? 알려면 둘 다 먹어는 봐야 될 거 아닌가. (난 둘 다 싫어서 콜드브루를 먹는다 ㅎㅎ)


같은 맥락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해 아직 사리분별이 안 된다는 것은, ‘아 내가 아직 경험의 총량이 불충분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괜히 ‘왜 살지’로 빠지지 말라고..


‘어떻게 살지’도 결국 취향이다. 취향의 부재는 경험의 부재로부터 나온다. 그게 라면이든, 그대가 매일 먹는 아메리카노든… 나아가 삶의 방식이든.


3. 그래서 너는 어떻게 살 건데? - 사과나무 마인드셋


금요일 아침부터 미안한데.. 내일 죽는다면 오늘.. 아니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말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가 영글고 내가 그 과실을 따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현재’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근간(根幹)으로 한다. 설령 끝이 보일지라도, 현재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죽음을 대하는 자세이다.


따라서, 오늘 좋은 일이 있든, 내일 나쁜 일이 있든, 모레 좋은 일이 있든, 사흘 뒤 나쁜 일이 있든, 나는 어떤 종자의 나무를,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심을 것인지에 집중할 뿐이다. 더불어, 나를 잘 알고 있으며, 현명하기 까지도 한 사람들에게 사내이사 자격을 줘 의논해 왔으며, 이밖에 나를 잘 모르지만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사외이사 자격을 주어 자문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왜’는 호기심 많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그럼에도 ‘삶’에는 ‘왜’를 되도록 던지지는 않는다.


왜?


’ 어떻게’에 집중하면 ‘왜’에 대한 답은 후행하거든

매거진의 이전글 눈, 눈빛, 시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