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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Jan 07. 2024

취미가 대화



1.

보통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열거주의 방식(positive lists)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고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게 된다. 이를테면, 특정 브랜드의 의류, 특정 프랜차이즈의 치킨, 특정 지역의 명소 혹은 사람에 대한 이상형 같은 것들 말이다.

반면, 대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포괄주의 방식(negative lists)에 가깝다. 싫어하는 것을 먼저 제시하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따분한 대화의 여집합을 모두 환영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2.

나는 대화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긴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음식은 생존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대화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대화를 위해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을 넓게 유지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대화를 목적으로 여기게 되면, 대화를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잘 보인다. 음식을 끼니를 때우는 용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수단)과 맛집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목적)은 같은 음식을 먹어도 분별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등등.  그래서 어떤 말을 내뱉든 그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대화를 하는 와중에 결핍들이 묻어 나오고 있거나, 무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거나, 교묘하게 과시하려는 것들 말이다.


3.

먹는 게 목적이라면 운동을 미리 하듯, 대화가 목적이라면 현생을 게으르게 살 수가 없다. 뭐라도 해야 소재가 생기기 때문이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성취해야 된다는 열망 보다, 이룬 것에 대해 회고하며 이야기할 때 즐겁다. 보통 2~3명이 대화하는 것을 선호하고 4명 이상은 기피한다. 경험적으로 발언권이 고르게 배분되지 못할뿐더러, 대화 양상이 뻔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 고려할 사람이 많아지면, 단어나 뉘앙스에 더욱 유의하게 되면서 결국 무색무취가 된다. 그렇다고 평이한 이야기로 소재를 국한시키면  피상적이고 단조로워져 버린다.


4.

대화가 깊어지면 인연이 형성된다. 최초에 어떻게 만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고 일정 깊이까지 도달했는지가 중요하다.


-수업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도서관, 카페를 전전하며 반나절을 쉬지 않고 대화한 적이 있다. 그 뒤로도 관계를 유지하며 이따금씩 글이나 생각들을 공유하며 지낸다. 괴랄하고 특이하여 가끔은 다소 급진적인이라 난감할 때도 있지만, 그로 인해 내 삶은 조금 더 다채롭다.

 

-지난 3년 동안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누는 벗도 있다. 이 분도 글을 많이 쓰는데, 글쟁이들의 섬세함으로부터 기인한 남다른 표현력과 관찰력은 현실에서 매우 귀하다. 오랜만에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는 사람을 조우했기에 소중하다.


-이밖에도 몇몇 대화 상대들이 있다. 논쟁거리가 되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벗, 2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10년 정도 알고 지내면서 교류하는 분과도 최근에 새로운 지평의 대화를 열고 있다.


5. 이따금 이런 사람들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필히 크나큰 상실감이 몰려올 것이며 삶은 전보다 무료 해질 것이다. 오직 그러한 존재들만이 나의 어떤 면을 활성화시켜 주고 또 존재함을 인지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 대한 아쉬움이나 그리움도 언젠가는 하나의 대화로 영글 것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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