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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돌보는 순간

<돌봄, 동기화, 자유>(2024), 무라세 다카오, 김영현역/다다서재

by 생강

지난 추석 때 88세 외삼촌 댁에 다녀왔다. 87세인 외숙모는 젊었을 때부터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했는데 조카 왔다고 과일 내놓는다고 부엌에서 포크를 계속 찾았다. 당신이 익숙한 부엌이니 찾겠지 하고 기다리는데 계속 못 찾아 부엌으로 가보았다. 아, 이게 아흔 가까운 노년의 모습이겠구나 생각했다. 외숙모는 바로 앞에 닦여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과일 포크를 보지 못하고 계속 포크를 찾았다.


동네 도서관 새 책 코너에서 <돌봄, 동기화, 자유 -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이 가능할까>를 발견하고 집어 들 때부터 궁금했다. 돌봄과 자유의 관계는 알겠는데 동기화는 무슨 뜻이지? 일본어 원제를 찾아보니 돌봄이 빠진 <동기화와 자유>였다. 한국어 번역에서 세 단어가 균형을 이루어 나란히 놓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는 방법이겠구나 생각했다.


<돌봄, 동기화, 자유>는 일본 후쿠오카에 소재한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숲’의 소장인 무라세 다카오 저자가 수많은 노인을 돌본 경험에서 깨달은 돌봄의 본질과 돌봄과 자유가 함께 할 수 있는지 저자가 매번 질문하며 매번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노인들과 매일의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에피소드의 끝에 도달하는 저자의 깨달음과 각성의 순간이 내게는 매번 철학 교과서처럼 느껴졌다.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이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라는 저자의 깨달음은 우리의 이제까지의 편견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어쩌면 우리가 인지 저하증을 겪는 노년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과 가장 거리가 먼 깨달음의 지점 아닐까?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이 불편하고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라 노인 편에서 보면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는 거라고? 놀라운데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이해가 간다. 그래서 더 놀랍다. 우리 대부분은 어르신들이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에 가장 놀란다. 사실은 내 얼굴을 잊어버린 부모가 야속하고 내가 가장 슬프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이야기인가. 저자는 노년의 편에서 이야기한다. 노인들은 ‘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고,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고,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되는 거'라고


삼촌의 인지 저하증은 냄새로 시작되었다. 혼자 사는 아파트의 묵은 짐에서 나는 오래된 냄새와 담배 냄새가 결합한 냄새가 자주 씻지 않은 몸에서 풍겼지만, 삼촌은 어제 씻었다고 얘기했다. 그때는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나중에 깨달았다. 삼촌은 진짜로 어제 씻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그리고 노인에게서 냄새나는 건 자연스럽다고도 얘기했다. 매일 씻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일 외출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지도 않고, 혼자 사는 집에서 안 씻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매일 씻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건 어쩌면 나일지 모른다. 삼촌은 알츠하이머를 겪으며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한 시절을 살았는지 모른다.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 논리로는 상대할 수 없는 세계, 사람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더더욱 제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저자의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어린 아이나 노년을 돌볼 때 내가 가장 무너지는 순간은 상대와 논리적으로 대화할 수 없을 때이다. 내 말이 통하지 않는데 저 조그만 아이가, 저 부서질 듯 약한 노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말을 듣지 않을 때, 괴물이 되는 나를 만나는 순간이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자기 속에 상냥하지 않은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 속에 그때껏 만난 적 없는 나를 만나는 순간, 이 제어할 수 없는 세계와 내가 돌보는 세계가 만나는 순간', 이 순간이 저자가 말하는 돌봄의 동기화의 순간이다. 저자는 돌봄에서 동기화란 ‘둘이 함께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권력의 작동보다 둘이 함께 지금 무엇을 하는지를 아는 순간. 우리가 만드는 다른 세계 안에서 순간적으로 돌봄을 받는 자와 돌보는 자가 서로 돌보는 순간이 마법처럼 발생한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보는 사람을 위해 몸을 살짝 들어주고, 저 사람이 나를 돕고 있다는 걸 순간이나마 알고, 흘낏 괴물이 되어 있는 나를 보면서도 최선을 다해 돌봄을 받는 자에게 돌봄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순간, 서로를 돌보는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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