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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어쩔 수 없는 일

<돌봄, 동기화, 자유>(2020), 무라세 다카오/다다 서재, 김영현

by 생강

미래에 일어날 법한 일을 예견해서 지금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 이게 정말로 가능할까.

(<돌봄, 동기화, 자유> 중에서)


정말 그랬다. 노년의 이는 그냥 빠진다. 노화란 짱짱했던 몸이, 근육이 사이사이 헐거워지는 것이다. 삼촌 집에 매일 들르면서 삼촌을 돌볼 때에도 이가 빠지는 걸 보지 못했는데 어쩐지 삼촌 인상이 변했다. 삼촌이 ‘이가 빠졌어’하고 빠진 이를 보여줄 때 깨달았다. 두 개의 이가 그냥 빠진 것이다. 휠체어에 타게 한 후 치과에 갔다. 겨우 일으켜 세워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데 삼촌은 영사 기사의 주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도, 이를 악물고 있으라는 이야기도. 잘 듣지 못하니 당연했다. 전해야 할 말을 종이쪽지에 써서 겨우 엑스레이를 찍고 나니 치과 상담실장은 당시 88세 알츠하이머 중기 노인에게 임플란트 치료를 권한다. 7개의 임플란트 치료가 필요하고 4개까지 의료보험적용이 가능하다고. 의사는 잠깐 삼촌의 구강 안을 들여다보고 치과 상담실장과 상담하라고만 했다. 그때까지 삼촌은 식사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임플란트 치료를 할지 안 할지 결정해야 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내 몸도 아닌데 내가 원하는 방향도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잘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래도 치과에 가자고 하니 삼촌은 치과 가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런데 한두 개도 아니고, 7개의 임플란트 치료를 88세 난청과 알츠하이머병 중기의 노년이 감당할 수 있을까. 스스로 치아를 관리하지 못하니 틀니도 대안이 아니었다. 치과에서는 90세 이상 노인도 임플란트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홍보했다. 본인이 오랜 치료를 감당할 체력만 있다면. 사람이 죽기 전까지 식사는 얼마나 중요한가. 숨을 놓기 전까지 음식 섭취는 계속된다. 임플란트 치료를 받지 못해 본인의 치아로 식사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삼촌의 먹고사는 일을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아득했다. 어떤 일이 미래에 일어날지 어떻게 알고 지금 현명한 판단을 하는 걸까? 그것도 어쩌면 타인의 삶과 죽음을 가를 수도 있는 결정을. 그건 저자 말대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눈이 포착한 것을 뇌와 마음이 어떻게 ‘체감’으로 변환하는지 저자는 흥미롭다고 하며 어르신들이 포착하는 세계와 초점을 맞추려면 아무래도 우리의 감각이 어르신들의 체감 쪽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삼촌은 거실의 소파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어느 날에는 어떤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을 집에서 쫓아낸다고 두려워했다. 집에는 아무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어느 날 TV를 함께 보다 깨달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장면을 현실과 혼동하는 거였다. TV에서 누군가를 쫓아내는 장면을 보고 자신이 겪는 일처럼 체감한 것이다. 나라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촌이 겪고 있는 세계와 나의 세계는 다르고 내가 삼촌의 눈으로 세계를 볼 때 동기화가 이루어진다. 인지 저하증을 앓는 노인이 느끼는 세계는 고속도로 위에서 운전하는데 양옆 차선에서 차가 끼어들고 있는 급박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알츠하이머 환자 보호자 교육 시간에 들었다. 어떤 다른 교육보다 삼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매일 삼촌을 돌보면서도 그전까지 한 번도 삼촌이 실제로 어떻게 세상을 느끼는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삼촌이 느끼는 세상을 상상하면서 그 세계가 어쩌면 나도 가끔 체감하는 세계인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에서 이해되지 않는 삼촌의 행동이 그 상상의 세계에서는 너무 이해되었다.


적어도, 어르신들이 돌봄을 기꺼이 받지는 않았다. 돌보는 나도 돌봄을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노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에 손대게 한다. 그 몸을 맡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댄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는 점이 우리를 구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돌봄, 동기화, 자유> 중에서)


누군가는 돌봄을 어쩔 수 없이 하지 말라고 했다. 흔쾌히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런데 누군가를, 특히 가족, 친지를 돌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안 할 수 없다. 내 아버지도 아닌 삼촌을 나도 어쩔 수 없어 돌봤다. 혼자 사는 89세의 알츠하이머 중기의 노인을 돌보는 나를 누군가는 ‘부모도 나 몰라라 하는데 대단하다’, 누군가는 ‘대가를 바라나 보다’ 했다. 내게 삼촌을 돌보는 일은 저자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돌봄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 내가 돌보지 않으면 삼촌은 쾌적하게 삶을 이어갈 수 없다. 그저 살아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냥 사람을 죽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인들과 일상생활을 함께 하면서 저자가 느낀 놀라운 각성의 순간들은 타인을 돌본다는 것이 결국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책에는 노년을 돌보며 깨달음의 순간에 이르는 저자의 철학의 시간으로 가득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읽은 돌봄 관련 책 중 최고이다. 이 책을 몇 년 전에 읽었더라면 삼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책을 읽으며 인지 저하증을 겪는 어른들을 보며 이전의 나처럼 오해하고 미워하는 일을 사람들이 조금 덜 하기 바란다. 돌봄의 과정에서 만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를 만나는 경험, 나를 알기 위해 어딘가로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타인을 돌보는 나의 움직임, 생각 모든 것에서 매일, 매 순간 나를 만난다. 앎이 이해의 배경이 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오랜 돌봄 생활의 뿌리 깊은 질문이 ‘돌봄이 자유와 함께 할 수 있을까?’였다. 돌봄 자체가 할 수 있음과 잘할 수 없음의 단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권력의 위계가 생겨버린다. 돌보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행위를 돌봐주는 일이기에 이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권력관계를 감당하는 것이 언제나 힘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저자는 가만히 이야기한다.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이 가능한 것 같다고, 서로 잘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 노력하는 것으로 괜찮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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