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가
얼마 전 지인과 카페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켜놓은 아메리카노의 향이 식을 정도로 소담한 이야기는 한 소쿰씩 쌓여갔다. 이야기 도중 마침 특이한 형태의 공연 이야기가 나왔다. 이 공연은 사전 극본 및 형태 없이 관객들의 사연을 듣고 공연예술가가 즉석 해서 극으로 표현 해내는 방식이었다. 공연자는 오감을 자극해 그들의 사연을 풀어내고, 선택된 관객은 이를 통해 본인의 감정을 케어하는 신개념의 공연이었다. 마치 사이코 드라마 같은 이 공연에는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이 공연의 한 부분으로 참여한다 했다.
하루는 상복을 입은 어느 관객이 첫 손님으로 올랐다. 시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찾아온 며느리는 생전에 시어머니가 하도 자신을 미워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했다. 장례를 마치고 마음이 허허해서 보러 온 공연. 이 예술가는 그녀의 마음속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애잔함을 즉석 해서 극으로 보여 주었다. 결국 그 관객의 눈에는 이슬이 맺힌다. 눈물은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바람에 흩날린다.
진짜 이야기는 카페에서 담소를 나눈 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이 예술가와 오랜 친구사이였다. 그녀 둘은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예술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삶의 속도와 방향은 모두가 다른 법. 한 친구의 조금 빨랐던 성공은 다른 친구에게 이유모를 미움으로 치환되었다. 모임 등에서 친구 얼굴을 보면 항상 마음에 부아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각자의 삶은 관성에 의해 각자의 방향으로 끌려갔다.
친구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이유는 나로부터 기인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는 그 예술가 친구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바빠서였다고 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에 묻히다 보니 미워하는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하지만 격정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난 뒤 돌이켜 생각해보니 바빠서라는 이유보다 더 깊은 이유가 존재했다. 바로 내 삶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심이 된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가야 할 길이 명확히 보였고, 그 생활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새 상대방에 대한 미움은 깃털처럼 사라져갔다. 그리고 비로소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평온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의 상대방에 대한 미움은 질투의 감정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뒷 이야기로 그녀는 그 공연 무대에서 친구에게 이러한 감정의 변화에 대해 털어놓게 되었고 예술가 친구는 그간 있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공연으로 보여주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가 그녀만의 이야기일까.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혹은 태초부터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살아왔다. 인간은 일정 대상과의 관계에서 비교우위를 느끼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해왔는데, 이는 인간이 사회적 자아를 생성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본인만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항상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해가며 살아야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곤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 나보다 운동을 잘 하는 친구, 나보다 더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곤 그들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순위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는 그들과 경쟁했고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삶인지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삶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내 것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 속에서 삶은 어느새 내 삶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오롯한 내 삶이 필요하다
그때부터 오롯이 내 삶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기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하려고 노력했다. 이기려고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잘 하려는 것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엄청났다. 비교 대상을 삼는 순간 모든 기준의 중점은 상대방이다. 결국 삶은 비교와 질투의 실타래로 구성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단지 잘하려 하자 삶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이러한 기본 성향의 변화는 성격에도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입는 것, 먹는 것,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 시작했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나는 무엇을 해도 되었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기도 했고, 한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으며, 혼자서 밥을 먹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누워 자기도 했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도 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이다. 우리는 교육받아왔던 전형적 경로를 탈피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 패러다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생각의 틀’을 말한다. 기존에 우리가 교육받아왔던 심리적 필터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게 되면 삶은 항상 타인을 위한 삶 혹은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삶으로 투영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선 먼저 내가 바로서야 한다. 스스로의 자존감을 찾지 못하면 그 자존감을 찾기 위해 심리적으로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다. 즉 타인을 통해서 나의 자존감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자존감은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지금 내가 자존감이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비교하는 삶을 살아서일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내려놓아보자.
처음 이 비교를 내려놓게 되면 잠시 동안 혼란이 찾아올지 모른다. 갈팡질팡 하는 이유는 삶의 목표가 일시적으로 없어진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목표, 행위의 수위, 책임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미 비교대상이나 기준점은 없다.
이러한 삶을 꾸준히 살게 되면 삶의 목표 정립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독립적 삶의 목표는 무언가의 달성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는 행위 자체라는 것. 행위 자체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온전한 자아가 형성된다. 그 뒤에 발생하는 삶의 변화와 속도는 아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가, 아니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가
외부의 바람은 내가 끌려다녀야 할 매개체가 아니다. 단지 자신만의 고고한 향기를 주변에 전달해주는 메신저이다. 오늘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가, 아니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가.
ps. 사진가가 쓰는 공감에세이 인문학 <관전 수필>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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