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해골물이 원효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며칠 동안 방구석에 배를 깔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여름에 개도 안 걸린다는 그 녀석이 어느 날 을시년스레 방문했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이 담배연기를 아무 생각 없이 흡입하던 어느 날. 왠지 조만간에 짓궂고 음흉한 웃음을 품은 녀석이 찾아올 것 같다는 복선이 편도를 통해 가득 느껴졌다. 비상이었다. 다음 날은 업체 방문 촬영, 다음날은 2박 3일의 지방 출장 촬영이 있었고, 그다음 주에는 강의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정을 징글징글한 그 녀석과 보내기에 우린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몸살감기가 찾아왔다
뭔가 대비가 필요했다. 가루커피를 따뜻한 물에 타서 연신 호로록 들이키며 스트레칭을 했다. 오랫만에 요금이 반토막으로 줄어 기뻐했던 보일러는 다시 가동시켰다. 짙은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낮부터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억지로라도 잠에 빠졌다. 일어나니 등과 머리맡에 땀이 흥건했다. 몸 안에 수분과 함께 바이러스가 일부 빠져나간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눈 아래부터 폭풍처럼 비강을 타고 재채기가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큰일이었다. 경험으로 봤을 때 이 재채기를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충격으로 인해 입천장에 바짝 붙어 있는 비강과 편도가 부을 것이다. 몸에서 가장 연약하고 순수한 이 부분들이 부어버린다면 그다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마 요 근래 이만큼이나 조심히 무언가를 했던 경우가 있었을까. 비강과 편도가 다치지 않도록 재채기를 조심조심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사랑과 재채기는 숨기지 못한다고 어느 고명한 생활 철학가가 말했던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니 사랑의 경우는 정확히 몰라도 재채기는 단연코 아니었다. 게다가 이색적인 것들을 발견해 내길 좋아하는 무명의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재채기의 시속은 160km가 넘어 몸에 무리가 갈 정도라고 하니 이러한 불가항력적 속도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결국 걱정하던 바는 현실로 되었다. 이 재채기는 내 몸살감기의 시발점이 되었고 밤새 잠을 설치고 일어난 다음날 쓰라린 입천장과 반쯤 부어 반달형이 되어버린 편도가 거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조심하려 신경을 썼지만 내 몸안의 장기들은 결코 내 마음을 몰라주고 몽니를 부려댔다. 이 녀석들아 너네들을 끌고 다니는 게 바로 나인데, 나에게 이렇게 대하 기냐라고 아무리 외쳐보아도 이 녀석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 즈음은 쿨하게 무시해버리는 녀석들이었다.
아침을 먹고 약국으로 달려갔다. 몸살감기약을 한 움큼 집어 주머니에 주섬주섬 집어넣고 집으로 걸어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드디어 열이 나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구나. 몸에서 결국엔 이상신호를 보내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해 나를 바닥에 눞이는구나. 그렇게 누워서 나는 몸의 신호들을 느껴야만 했다.
누워서 바라본 천장은 생각보다 높았다. 이렇게 천장이 높았나. 평소 때는 그리 높지 않았던 천장이 점점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천장은 점점 뒤틀리며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머리에 열이 오르면서 천장이 불에 타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천장을 보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서서히 수마(睡魔)에 빠져들었다.
일어나자 몸의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신이 멍해서 시야가 흐릿했지만 몸의 고통들은 조금씩 더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편도가 따끔거려서 물을 마시기 힘들었다. 입을 벌려서 혀를 바닥에 바짝 뉘이고 거울을 보니 하트 모양의 편도가 보였다. 평소보다 훨씬 부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코가 콱 막혀서 숨을 크게 내 쉬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눈 아래가 찡긋해지면서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왼쪽 코를 휑하니 풀자 오른쪽 귀가 막혀 버렸다. 웅웅 거리면서 일시적인 진공상태가 찾아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한순간 혼란스러워졌다.
우리는 아픔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문득 물밀 듯이 생각이 밀려왔다. 내 몸의 ‘장기’들이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알리고 있구나. 그들도 어찌 보면 각자 모두의 독립적인 생명체 들일 것이다. 누가 뭐라 하든 내색치 않고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실행하는 개별적 생명체들. 그들은 본인들의 업무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다고 질투하지도 사보타주하지도 않는다. 다만 각자의 역할이 모여 완성된 한 명의 인간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몇십 년간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노고에 대해 전혀 알려고도 않고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러다 한 번씩 몸에 아픔이 찾아오면 그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편도가 무슨 일을 하고 어디 붙어있는지, 위가 어떤 일을 하고 어디 붙어 있는지... 반대로 그들 역시 아픔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알리곤 한다.
원효의 해골물은 원효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아픔이라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몸의 아픔을 통해 우리는 나를 구성하는 누군가와 소통하고 이야기한다. 이는 아픔이 주는 선물이자 무지한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인간 스스로의 발버둥이다. 어차피 무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데 사는 동안 그것들과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감사할 일 아닐까. 원효의 해골물은 원효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깨달음의 물이다. 오늘도 깨달음의 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어본다.
PS. 몸이 아프고 지방출장관계로 지난주 관전수필을 쉬었네요. 관전수필은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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