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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수필] 기획력은 통찰을 기반으로 한다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



 요즘 한 마을기업의 상품 패키지 기획을 해주고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포장 패키지가 촌스럽고 상품의 특성을 제대로 나타내 주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그쪽 컨설턴트분의 전화를 받고 일정을 잡아 4시간을 운전해 인제에 도착했다. 강원도로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산이요 나무였다. 세상은 초록으로 가득 찼고 눈이 시원했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니 코 끝에 스치는 공기부터 달랐다. 그 강원도 다움은 말이나 글로 결코 표현해 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곳 대표님과 인사를 드리고, 미팅을 진행했다. 수시간의 미팅 후에 나온 결론은 도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패키지 디자인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직업 이외 나는 기획자라는 직업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브랜드의 방향을 정하고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를 디자인으로 어떻게 구현해 나갈지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과연 도시적인 게 무엇일까? 도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경험상으로 보면 분명 구분은 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와 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따로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수준 차이라기보다는 주변 환경의 영향 덕이다. 눈에 익은 형태와 소리와 이미지에 사람들은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촌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지방에서는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오히려 도시적으로 모던하게 만드는 콘텐츠들이 지방 사람들에게 어색할 뿐이다. 그래서 지방의 콘텐츠를 기획하게 되면 약간의 간극이 발생한다. 처음 기획을 해서 초안을 보여주면 대부분의 대표들은 우리가 볼 때 더 촌스러운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든 제품의 콘텐츠는 소비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표나 생산자들은 본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본인이 만족하는 선에서 상품을 만들곤 한다.      


 이번의 경우도 유사했다. 도시적이라. 과연 도시적인 게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관련 전문가의 의견들도 수집을 했다. 결론적으로 요즘 패키지 디자인의 경우는 깔끔하고 모던하게 가는 것이 대세였다. 기존에 상품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지나 여러 문구들을 집어넣었었다면, 최근에는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 대부분의 것들을 빼고 하나의 포인트만을 강조하는 것이 주류였다. 심지어는 텍스트만으로 조합을 하여 패키지 디자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색상과 스토리를 만들어 얹고 디자이너와 캘리그래피 작가의 도움을 얻어 초안을 제작해서 내밀었다. 반응은 꽤나 괜찮았다. 매우 만족합니다. 훌륭하네요. 맘에 들어요. 그런데 글자 색깔이 초록색이 좋겠어요. 강원도 사람들은 초록색을 좋아하거든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 강원도 사람들은 초록색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이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초록색보다는 이 색상을 더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있으랴 초록색과 기존 색상 두 개를 제작해서 보여줬다. 음 해놓고 보니까 기존 색깔이 좋네요. 기존 색깔로 가자고요.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이미지 하나, 내용 하나씩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이것도 좀 넣어주시면 좋을 듯하고 이런 그림도 좀 들어가면 좋을 듯하고. 듣다 보니 그러다간 제품 박스가 도화지가 될 것 같았다. 결국 이런저런 논의 끝에 기존대로 깔끔하게 텍스트와 작은 이미지 하나만 들어가기로 협의했다.     




모든 기획은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이곳만 그런 것은 아니다. 콘텐츠 기획을 하다 보면 무언가를 가득 채워주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너무 허전해요. 여기다 이런저런 것들 좀 더 채워주세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디자인의 힘은 ‘전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콘텐츠를 제작할 때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전달성이다. 사람들은 이를 간과한다. ‘글’로 치면 바로 가독성이다. 화려하거나 시선을 빼앗길 요소들이 있으면 가독성은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꾸밈이 많은 글씨체를 읽기 힘든 것처럼, 디자인을 포함한 여러 매체들도 전달이 잘 되려면 심플해야 한다. 물론 필자는 이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 이외에 사진을 거의 주업만큼이나 하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흔히들 뺄셈의 미학이라고 한다. 사진은 기존의 복잡한 세상을 사각의 프레임 안에 주제를 명확히 담는 행위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씩 채워가는 그림과는 달리, 무언가를 계속 빼야 한다. 이 사실에 대해 처음 사진을 찍을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진을 오래 찍고 작가로서의 길을 준비하다 보니,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주제와 부제가 들어가도록 촬영하세요 혹은 피사체에 조금 더 다가가서 촬영하세요 같은 사진의 기술적 부분들은 모두 이 뺄셈의 미학을 바탕으로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사진뿐만이 아니다. 일전에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재인 씨의 카피를 만든 카피라이터 정철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 중에 탈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정철 선생님은 끊임없이 썼던 글을 줄여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10줄의 글이 한 줄의 글이 될 때까지 줄여나가다 보면 한 줄의 글에는 열 줄의 글 이상의 힘이 담길 수 있다 라는 말을 들었다.      


 이 모든 경우들은 ‘소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심플한 비움의 미학은 모두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기 위한 소통의 방법인 것이다. 우리가 상품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카피를 쓰는 최종 목적은 ‘전달과 소통’이다. 그런데 우리는 업무의 중간에 이러한 점을 간과해버린다. 목적이 과정에 매몰되어 버리면 우리는 갈피를 잃고 헤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에서 ‘통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통찰은 우리 삶에서 최종 목적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통찰이 없으면 과정의 하나하나에 그 목적을 두어 최종 목적지가 변경될 경우가 많다.     





기획자는 이 통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예는 고 정주영 회장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겨울 UN 사령군에서 연락이 왔다. 부산의 UN군 묘지에 잔디를 깔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닷새 후 세계 각국의 UN군 사절들이 내한하게 되어 있었는데, 묘비만 덩그러니 놓인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UN군 측은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었다. UN군 사령군 측은 정주영 회장에게 이 일을 맡겼다. 정주영 회장은 그 전에도 미군 병사의 숙소를 일주일 만에 만들어 낸 기염을 토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UN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기대를 걸어 보았던 것이었다.     


 한 겨울에 불과 일주일 만에 그것도 푸르른 잔디밭을 만들어 내야 한다니.

 정주영 회장은 번개 같은 아이디어로 트럭 30대를 몰고 낙동강 보리밭으로 간다. 한겨울이어서 이제 파란 새싹을 내민 채 겨울을 기다리고 있던 보리는 UN 묘지로 모두 이장된다. 황량하던 UN 묘지는 푸르른 초목이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해버린다. 며칠 후 UN사절단은 이 아름다운 광경에 ‘원더풀’을 연발했다. 이를 통해 정주영 회장은 시세의 3배가 넘는 차익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통찰의 힘이다. 만약 정주영 회장이 UN 사령군이 이야기하는 ‘잔디’에만 집중했더라면 이 미션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잔디’는 UN 사령군이 묘지를 푸르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를 한 것일 뿐이다. UN 사령 군의 최종 목적은 묘지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고, 정주영 회장은 이를 꿰뚫어 보았다.      


 이렇게 통찰력이 있으면,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들을 낼 수 있다. 기획자는 이러한 통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적인 파트는 기술자들이 해내지만 이 진로를 설정하는 것은 바로 기획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획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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