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요 얼마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일에 대해 몰두하고 잠도 줄여가며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보니 밥 먹을 때 숟가락도 급히 움직이고, 걸음도 빨라지고, 말도 빨라지는 것이었다. 마음이 바빠지니 그런 것이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리라.
이걸 보면서 과연 사람에게 몸과 마음 중 어떤 것이 더 중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필시 사람이라는 형체를 이룸에 있어 몸은 형태를 이루고 마음은 몸을 관장한다. 그런데 몸만 있고 마음이 약하면 몸을 함부로 쓰게 되고, 마음은 강하지만 몸이 약하면 흔히 정신력으로 버틴다 라고 이야기하듯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다라 말할 수 없다. 특히 요즘엔 마음 작용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들을 많이 느낀다.
마음작용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을 많이 느낀다
오늘도 어제 마감해야 하는 일 때문에 새벽 늦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강의가 있어 나가봐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자기 전부터 늦게 일어나 일정에 차질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늦게 일어나서 모든 일정들이 다 펑크가 난 것이었다. 부랴부랴 핸드폰을 챙기며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는데 부재중 전화가 한통도 오지 않은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깨어보니 꿈이었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도 알람 맞춰놓은 시간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도 마음에 긴장이 되다 보니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2~3시간을 잤다면 피곤해서 고개가 꾸벅꾸벅 눈이 어질어질할 텐데, 이렇게 마음이 긴장되니 잠이 싹 달아난 것이다. 생각해보니 평소 2~3시간을 자면 잠을 별로 안 잤으니 피곤할 거야 라고 내심 생각을 해버린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는 게 맞는 거야 라고 위안을 한다. 그러다 보면 잠이 쏟아지고 수마의 힘에 밀려 다시 8~9시간을 자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몸은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생활에서 종종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심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임의로 천천히 움직이게 되면 급한 기운이 가라앉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바빠 종종걸음을 거닐 때에 우리는 그것에 매달려 내 마음이 안달이 났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로소 모든 일이 끝나고 뒤돌아 볼 때에서야 내가 바빴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하는 일마다 실수가 늘게 되고 시간은 오히려 더 소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이 살인자나 유령들에게 쫓길 때 손을 떨면서 자동차 열쇠를 제대로 꽂지 못해 출발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 그것이 우리 마음이 바쁠 때의 모습이 아닐까.
법정스님은 무소유는 물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라는 수필집에서 난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스님은 아는 스님이 선물해 준 난초를 3년간 정성스레 키웠다.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에 옮겨주기도 하고 겨울에는 난초 때문에 실내 온도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을 바깥에 놓고 자리를 비운 틈에 뙤약볕이 내리쬐자 난이 걱정돼서 허둥지둥 절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내가 난초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라는걸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물건에 대한 집착에 대한 일화이다. 하지만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으면 집착이 일어난다. 항상 더 잘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지만 이러한 표면적 집착이 너무 가득 차게 되면 마음에 바람들 곳 하나 없어진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란 놈이 탁해지기 마련이고, 분별력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잠깐식의 심적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살다 보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일이 바빠지면 벌써부터 아드레날린이 솟고 여러 걱정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전개되니까 말이다. 그럴 때면 일을 멈추고 느릿느릿한 음악을 듣는다. 반복되는 느린 선율 사이로 마음이 한적해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일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인다. 마음에 공간이 생겨야 외부의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꽤나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혔다. 사공은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그 배가 빈 것을 알고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떠내려온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했을 것이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째 소리치는데, 그때는 반드시 욕설이 따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롭게 하겠는가? -장자 <산목> 편 중-
장자 산목 편의 대목이다. 우리는 처음 가진 빈 배를 짐이 가득 찬 화물선으로 만들고 있다. 혹은 사람이 가득 찬 크루즈 호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마음에서 자발적 가난을 찾아야 할 때이다. 독일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물질주의의 소산인 현대적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며 사는 자발적 가난이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장자의 비움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비움이란 생물학적 필요 이상의 소유를 가지지 아니함을 말한다. 하지만 마음도 이러한 자발적 가난이 필요하다. 마음 역시도 비움의 철학이 필요하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물질주의에 대한 경계는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참 망각하기 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러한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한가할 때 나를 지켜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바빠지면 금세 이런 사실들을 까먹고 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