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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수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예전에 그러니까 대략 20여 년 전 이런 책의 제목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이 책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이 책은 사법 고등 고시 합격 수기를 모아 놓은 책이었다. 그 책에는 수많은 눈물겨운 수기들이 담겨 있었다. 헌 책방을 자주 다니던 나는 이 책을 어느 후미진 동네 헌책방의 꼭대기 층 책장에서 찾아냈다. 적당히 손 때 묻은 빛바랜 아이보리색 표지 위에 수식 없이 담백하게 적혀 있는 제목 텍스트, 텍스트 위에는 법과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어가 눈에 헝겊을 가리고 칼과 법전을 들고 있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책의 뒤편에는 이름 모를 더벅머리 총각이 합격 후 해맑게 웃고 있는 흑백 사진이 실려 있었다. 책을 들쳐보다가 책방 중앙에서 희끗희끗한 반백에 하얀 수염을 기르고 난로 위 노란 주전자에서 보리차를 따라 마시던 책방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분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이가 아니었을까.     





 정가 만 원짜리 책을 3천 원에 구매한 후 나는 단숨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사실 읽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책에 담겨있는 삶의 비장함과 우울함은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어릴 때 동네 문고에서 ‘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이 비슷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고등고시(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일이 하늘에 별 따기였다. 그땐 로스쿨 같은 대체 제도도 없었기에, 고시를 준비하는 이들은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 하나에 모든 인생을 걸어야만 했다. 대신 고시를 합격하면 신분의 수직 상승이 보장되던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책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책에 수기를 썼던 이들은 대부분 집안 환경이 넉넉지 않은 민초들이었다. 하긴 집안이 부유하고 지위가 높았다면 신분상승을 위한 시험을 굳이 볼 필요가 있었겠는가. 시골에 홀어머니를 두고 노량진 고시원에 올라와 눈물겨운 빵을 먹어가며 공부했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인과 아들을 돌보며 일곱 번 만에 합격한 이도 있었다. 8~90년대 먹을 것도 부족하고, 삶도 그리 부유하지 못했던 시절 그들은 그들의 꿈을 불태웠던 삶을 하나하나 기록해갔다.     


 사실 우리나라에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상황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면, 어느 정도 취업이 보장되었고, 취업 이후에도 지속적 승진이 가능했다. 당시에도 현장의 어려움들은 있었겠지만, 청년실업이 이렇게 세상을 뒤엎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하는 사태까지는 아니었다. 현재의 청년들은 경력을 쌓을 터전도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차이는 세대 차이를 만들었고 갈등을 자아내었다. 나이 든 사람들 중 일부는 젊은 세대들에게 참을성 없고 진득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고, 청년들은 지금보다 쉽게 세상을 살아왔던 그들을 ‘꼰대’로 치부하고 서로를 물어뜯는다. 이러한 간극은 아마도 각자의 삶이 가장 힘들었다고 느끼는 인간의 상대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고시생들은 당시 손쉬운 길을 버리고 고시의 가시밭길을 택했다. 물론 본인의 영화를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본인의 목표를 위해 이렇게 뛰어왔다. 그런 부분에서 보면 만약 그들이 지금 꼰대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노력만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수기들을 보면 의례 그들의 공부 방법들이 공개된다. 과목별 공부방법과 함께 수험 생활들이 공개되는데, 대부분 하루에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생활들의 핵심은 생활의 단순화였다. 하루에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모두 공부에 올인했다. 밥도 공부를 위해 소화가 잘되는 죽을 먹거나 소식을 했고, 체력을 위해 1시간의 산책을 하면서 그날 공부했던 것들을 요약하곤 했다. 책은 보통 적게는 5 회독, 많게는 10 회독을 하여 책에 있는 모든 내용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생활의 모든 것을 고시에 위해 오롯이 불태우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 책은 내게 사람이 성공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구나 라는 걸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든 것과 실제 실행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하루에 15시간, 16시간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1년 이상의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한다는 것은 치밀한 페이스 조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의욕 가득한 첫날로 시작하여 보통 한 달을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다. 실패의 끝은 항상 좌절과 자학이었다. 그것은 결과를 성취하지 못함 이전에 나 스스로에 대한 과정에 대한 실망이었다. 왜 나는 이렇게 끈기가 없을까.      


원래 일반적으로 사람은 그다지 끈기가 없다


 그러다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집중력이나 끈기가 없다. 만약에 모두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수기가 책으로 엮여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시라는 게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본인을 자학한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 때문이라도 그럴 필요는 없다.      


 두 번째로 사람 마다의 성향이 다르다. 끈기 있게 무언가를 붙잡고 장인정신으로 하나만 파는 것을 좋아하여 경지에 오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것 저것 경험해보고, 이를 통해 총괄적으로 결론을 내는 이가 있다. 이것은 개인적 사고 구조의 차이이지 어떠한 것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만 계속 몰두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을 읽어도 여러 권의 책을 돌려가며 읽고, 일을 하더라도 일을 조금씩 나눠가며 여러 가지 일을 한다. 글도 여러 개의 글을 동시에 쓰는 편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경험 삼아 귀납적으로 보더라도, 이러한 삶의 방식들을 보더라도 후자의 방식 필자에게는 더 잘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무언가를 오랫동안 집중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애정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동안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던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끈기가 없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좋아하는 일들은 꽤나 꾸준히 하곤 했다. 사진을 10여 년간 꾸준히 찍어오는 것만 보더라도 볼 수 있고, 브런치의 경우도 1여 년간 쉬지 않고 글을 써왔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을 찾을 때 삶이 살만해진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니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용기가 없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기존의 일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경제적인 부분을 얼마 동안만 포기한다면 남은 평생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 이러한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눈을 꾹 감아야 한다. 눈을 꾹 감고 용기를 내서 실행을 해야 한다. 실제 경험자로써 이야기를 해보자면, 전혀 돈이 안 될 것 같은 일도 시작하다 보면 그곳에서 먹고살 것들이 생기고 보이게 된다. 그때부터는 탄력을 받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입성해서 남들보다 늦었다고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경험들이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자양분이 될 테니까.     


물론 고독은 본인의 몫이다


 물론 고독하다. 세상의 속도와 다르게 가는 고독감은 완전히 본인의 몫이다. 그것은 아마 평생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이 덜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해보지 않고 끝나는 삶보단 낫지 않는가.




 만약 신이, 아니라면 교차로 악마가 내게 와서 과거로 다시 돌려줄 테니, 지금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제의가 돌아온다면, 나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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