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인생의 개론과 같다
인문학 열풍! 인문학은 개뿔?
얼마 전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위의 제목의 글을 보았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인문학을 공부했던 글쓴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문학에는 답이 없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사와의 갈등이 문제라면 조직 갈등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고부간의 갈등이 문제라면 고부간의 갈등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맞다 라는 의견이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글쓴이는 인문학과 철학을 전공까지 했는데 왜 삶에서 인문학이 필요 없다 라는 의견을 내놓았을까.
과연 인문학은 학문일까
인문학은 뒤에 학(學)이라는 단어가 붙었지만, 사실 학문이라 정립해 부르기에는 애매한 분야이다. 단지 기존의 축적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학’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것은 암기과목처럼 공부해서 익혀지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도리 혹은 방법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암기하여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건들을 부딪히며, 새로운 인문학을 습득하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물의 종착지는 바다로 통하듯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일된다라는 의미이다. 무협지에서도 종종 쓰이는 이 말은 무학의 종류는 다르되 절정이 되면 하나로 통한다 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래서 절정의 고수들은 그 무학을 논하는 데 있어 파가 다르거나 무공이 달라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무학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 전반에는 이 만류귀종의 법칙이 관통하고 있다. 이 법칙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더 뚜렷하게 느낀다. 아마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대부분의 처음 하는 일들의 그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점점 쉬워지는 경험들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이러한 법칙을 깨닫는 것을 우리는 ‘연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통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법칙을 깨닫게 되면 처음 해보는 일도 요령이 생겨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 이것이 인문학이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인문학은 각각의 학문에 있어 개론과 같다. 개론은 학문의 개괄적인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학문의 발생 역사, 패러다임의 변천과정, 윤리적이고 도의적인 학문의 역할 등의 내용을 담고있고, 각론으로 가면 비로소 디테일한 학문의 콘텐츠와 스킬들을 배우게 된다.
인문학은 학문에 있어 개론과 같은 개념이다
법학을 예를 들어보면 법학 개론에는 법학의 역사와 법학이 가진 전반적인 흐름 혹은 기준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전반적 기준은 모든 법을 관통하는 가치관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법학 개론을 배우면 우리나라 법에 대한 개괄적 관점들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헌법을 비롯한 민법, 형법, 상법 등의 각각의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끝이 아니다. 민법, 형법 등의 실정법들은 다시 개론과 각론으로 나뉜다. 형법을 예로 들면 형법총론과 형법각론으로 나뉘게 된다. 형법 총론은 형법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 사항들에 대해 정리해 놓았다. 각론으로 가면 각각의 범죄, 그러니까 살인죄, 방화죄, 강간죄 등의 요소들에 대해서 다루게 된다. 자 그럼 여기서 이 많은 구조를 가진 학문에서 과연 어떤 부분이 더 중요할 것인가. 실무적인 부분들을 다루는 각 법의 각론이 법학을 배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일까?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살인죄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다. 살인죄의 구성요소와 위법성, 책임 등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어떠한 행위가 살인이 되고, 어떠한 행위는 살인이 되지 않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살인죄만을 공부하게 되면, 살인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지 몰라도,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으며 추측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 우리 사회에 관통하고 있는 ‘맥’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법총론을 공부하게 된다면, 다른 범죄들도 어떤 식의 구조로 범죄가 구성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리하면 전반적인 형법의 흐름에 대해서 파악을 할 수 있다. 거기다 다시 법학개론을 공부하게 되면, 우리나라 법의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의 법학개론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인문학과 괘를 같이 한다.
인문학을 통해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의 삶의 자세를 피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문학의 습득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 장님 여러 명이서 코끼리를 만져서 서로의 의견들을 주장하며 코끼리의 모습을 추측해봤자, 코끼리의 부분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코끼리의 모습에 대해 물어보면 각각의 장님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뱉을 것이다. 삶도 부분에 매몰되어 전체를 못 보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는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을 하나의 작은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올라온다. 게시자는 이러한 사연을 올리고 다른 이들은 댓글을 올린다. 댓글을 적는 이들은 게시글을 보고 본인들의 의견을 적곤 하는데, 이러한 의견이 그 커뮤니티의 성향에 따라 많이 달라지곤 한다. 정치적 성향, 남녀의 성향, 보수 혹은 진보적인 성향에 따라 작은 모래로 시작했던 게시글은 커다란 바윗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댓글들을 보면 사건의 맥을 보지 않고, 작은 요소들로 결론을 내 버리는 내용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게시글 만으로는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고, 글 자체가 게시자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있어 글을 보고 댓글을 적는 이들이 정확한 판단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쉽지 않다. 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과 흐름이 너무 자극적이고 편향적 이어 보인다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삶을 관통하는 맥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를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삶을 관통하는 맥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맥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맥’ 이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은 각자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은 본인만의 문제이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할지, 본인에게 득이 될지,다수에게 현명할지는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범위는 넓기도 넓을뿐더러, 어떤 분야도 그 범주에 속할 수 있다. 보통 인문학이라고 하면 논어, 맹자, 장자 등의 동양고전이나, 플라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등의 서양철학을 지칭하는 것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그 역시도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들의 사상들은 인류의 삶에서 축척되고 개정되고 수정되며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글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고통, 고부갈등이나, 상사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인간은 역사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논리적으로 실증이 불가능한 요소에 대해 대대로 두려움을 느껴왔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하늘이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땅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번개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어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다 조금씩 과학이 발전하며 자연현상에 대한 원인이 밝혀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부분들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 말은 삶에 대한 본인의 사고 구조가 정확히 형성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삶을 더 원활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역사적으로 과학이 담당해왔다.
철학과 과학을 통틀어 우리는 인문학이라 부를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죽음은 어떠한가. 아직까지도 죽음은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이며 때에 따라서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에 대해 우리 선조들도 꽤나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중에 꽤나 필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던 이는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로스토이다. 그는 원자론에 대해 이야기한 철학자였다. 그는 세상은 모든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도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으로 단지 생겨난 것일 뿐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우연히 결합된 원자가 분해되는 과정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플라톤은 죽음에 대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살아남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영혼은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해방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역사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과 사고가 존재해왔다. 이러한 의견들을 보면서 우리는 본질에 대해 사고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질에 대한 사고는 기존의 의견들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좋은 자양분이 된다 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대대로 철학이 담당해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
그러므로 인문학은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각론의 디테일함이 아닌, 삶의 맥을 짚어주고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사고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들도 어렵지 않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인문학이 필요 없다 라는 글에서 조차 우리는 인문학을 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문학을 인문학이라고 규정짓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문학이라고 규정짓는 순간 인문학은 인문학이라는 개념적 틀 속에 갇혀 버리고 말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것보다는 모든 삶의 가치들에 대해서 열어 놓는 연습을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인문학적 소양은 자연스레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