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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시작]글쓰기가 어려웠던 진짜 이유

글쓰기,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혼자서 끄적이며 글을 쓰던 당시에는 글 쓰는 일이 참 쉽고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닿아 여기저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읽고 좋아해 주었다. 또 그 덕에 용기 내어 책도 내게 되었다. 사람이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욕심이 난다고, 점점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옭아매었다.  

    


글을 점점 잘 쓰고 싶은 생각이 나를 옭아매었다



 글을 쓰려하다가도 과연 이 글이 지속 가능한 콘텐츠 인가를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연재가 가능한지 고려하고, 그러다 보니 글을 쓰기 전부터 전체 목차를 잡곤 했다. 책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최소한 목차당 몇 페이지의 분량이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계산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러한 걱정들 때문에 키보드를 놓아버린 주제들이 부지기수가 되었다.      

 내용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글의 주제가 독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것인가. 주제가 텍스트로 표현하기 적당한가.      


이것은 실패의 두려움에서 기인되었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2년 전만 하더라도 글은 힘들 때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편안한 소화제 같은 역할을 했었다. 글을 쓰며 생각의 정리를 했고, 머릿속의 내용들을 이렇게 멋진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2년이 지난 지금 글쓰기는 성공시켜야 하는 팍팍한 미션이 되고 있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실패해 보지 않은 자가 느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처음 생각했던 결과치에 쉽게 도달해버렸기에 다음에 그만큼의 성공을 또 해야 한다는 이유모를 두려움. 무심코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한계치에 도달하고 아래를 보니, 비로소 두려움이 엄습하는 초보 비행사의 심리적 아찔함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과연 글은 누굴 위해 쓰는가    


 그러다 보니 ‘글쓰기’는 하나의 짐이 되기 시작했다. 쓰기 전에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글에 ‘나’는 없었다. 과연 ‘글은 누굴 위해 쓰는가’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글은 쓰는 이의 산물인가, 읽는 이의 산물인가. 꽤나 오랜 시간 고민했다. 이 질문이 머릿속을 난립할 때 나는 약간의 절필-진짜 글을 많이 쓰는 이들이 들으면 웃기겠지만-을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사실 자의적으로 절필을 선언했다기보다는 더 이상 문장 한 줄 이상 쓰기가 어려웠다.     


타의적인 절필은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왔다



타의적 절필을 하다


 그리고 한 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는 동안 끊임없는 불안감과 죄의식에 시달렸다. 마치 다이어트를 위해 매일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한 자가 운동을 빼먹는다던지, 밤늦게 치맥을 먹으며 느끼는 죄의식과 비슷했다. 분명히 매일 글을 써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의무적 죄의식이 찾아왔다. 대략 반년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무언가 더 창조적인 생각과 행위를 하려 애썼다.     


 다행히 직업 특성상 창조적 표출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사진을 찍는 직업. 그래서 시각적인 표현에 항상 고민한다. 와이프는 종종 뇌를 좀 쉬게 하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생각하는 행위가 내게는 쉬는 행위이자 존재적 정체성을 준다.     


오랜만에 찾아온 필진 문의에서 터진 글쓰기


 그러다가 오랜만에 필진 문의가 왔다.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의 정책 홍보를 위한 시리즈물이었는데, 첫 번째 글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 했다.     

 아주 오랜만에 키보드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머리가 뻑뻑했다. 머리 안에서는 수많은 단어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아귀의 목구멍 같은 출입구 덕에 난항을 겪었다.

한동안 글을 시작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물레이션을 했다. 어느 순간 막힌 코가 뻥 뚫리듯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언 터져 나오듯 쏟아지는 글들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글을 다 적고 나니 A4지로 6페이지의 글이 나왔다. 처음 요청이 들어온 글은 대략 2~3페이지의 글이었으나 그 두배 분량의 글이 쉼 없이 나왔다.     


 키보드의 두드림이 끝났을 때에 윤활유가 꿀물처럼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겨우내 움직이지 않았던 근육을 강력한 스트레칭으로 풀어낸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글쓰기란 게 자전거 타기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어색하긴 하지만 몇 번 타보면 금세 다시 옛날처럼 탈 수 있는 것이 자전거 타기의 습성이라면 글쓰기도 그와 비슷했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쓸 것인가 였다. 그런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실은 아마 나 스스로 부인하려 했기에 인지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통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인정의 욕구 때문에 글은 점점 어려워졌던 것이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지라 처음 글을 썼을 때의 초심. 단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 마음적 여유만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그 마음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잠재적으로 남아있던 욕심은 항상 글이 대 서사시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항상 책을 내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항상 누군가에게 읽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은 아주 배부른, 책과 글쓰기가 유일한 벌이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직업인 ‘사진’에서는 이렇게 가벼운 마음을 느끼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가라는 직업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글쓰기 역시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깨닫게 되었다.     


사진가라는 직업에서 글쓰기에 대한 방법을 배우다


 사진. 나는 사진을 취미로 찍다가 직업으로 전환한 케이스이다. 처음 취미로 찍을 때의 사진은 마냥 즐거웠다.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혼자 여행 다니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진을 직업으로 삼게 되고 몇 년이 지났을 때 사진 역시도 점점 어려워졌다. 노멀 한 상업적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나를 위한 사진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위한 사진으로 사진의 주체가 바뀌면서 사진은 필수적으로 확실한 결과물들을 얻어내야 했다.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을 때에는 패배감에 우울했고, 상대가 만족할 때에는 그 즐거움으로 다시 힘을 얻어 시작했다.      


마니아층을 만들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고 고객의 취향과 나의 취향을 섞을 수 있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나는 맹목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비대중적이지도 않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변화를 통해 외부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점은 마니아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내 스타일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그들은 내게 사진을 의뢰한다.     


내 사진은 마니아층들이 선호하는 사진들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글, 사진 같은 소통의 매체들로 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점은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누군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굳이 고객들에게 맞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내 글을 볼 것이다.      


 이 6천만 인구, 전 세계로 치면 60억의 인구 중에 내 글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없을까. 오히려 자꾸 내 모습이 바뀐다면 기존에 나를 믿어왔던 독자들도 나를 등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 진심으로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담백한 글 속에서 나는 나도 찾고, 나와 비슷한 누군가도 찾고 또 내 인생도 찾는다. 그리고 또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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