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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탐정의 후예가 되어야 한다

불완전한 언어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








 요즘은 채소 사 먹을 일이 없다. 올해부터 집 앞에 조그맣게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텃밭으로 짧은 축은 한걸음, 긴 축은 큰 걸음으로 4걸음이나 가야 하는 공간이다. 여기에 깻잎,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파 등을 심었다. 2달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먹고 넘치는 양이 수확되고 있다. 


 텃밭에서 수확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대견하다. 사실 그다지 한 것도 없다. 처음 모종을 사서 심고, 비료를 뿌리고 기다렸다. 조금 노력한 거라곤 기다란 호스를 사서 물을 준 정도. 물을 주는 일도 사실 귀찮아 비가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귀찮다가도 서서히 자라는 녀석들을 보면 물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 비가 오면 생각지도 못하게 쑤욱 자라 있는 녀석들을 볼 수 있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처럼 눈에 보이게 무성해 있는 모습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농부들이 보면 그냥 정원 가꾸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텃밭 농사이지만, 이 또한 삶의 작은 재미를 주는 데 있어서는 전혀 모자라지 않다. 얼마 전부터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지 수확을 해도 해 녀석들이 넘쳐난다. 깻잎과 상추는 매일 수확해서 먹어줘야 하는 지경이다. 



 가득 수확한 다음날 다시 그만큼의 양이 채워져 있을 때 나는 자연에 대한 깊은 감사를 느낀다. 하지만 평소 느끼던 감사와는 그 무게가 다르다.


아마 평생 들었을 것이다. 자연에게 우리는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한 번도 깊이 다가온 적이 없었으며-난 도덕적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제대로 인지한 적도 없었다. 도덕책에 나오는 모든 말들이 그러하다. 맞는 말인지는 알지만 결코 삶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맞는 말일수록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 너무 많이 인용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맞는 말일수록 그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너무 많이 인용되기 때문이다.



scene #2 월곶. 김포




아무리 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싫다. 살면서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도 이젠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하다. 이제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 가벼워 깃털처럼 날린다. 


자연을 보호하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등등


그냥 첫음절만 들어도 식상하다. 자연을 왜 보호해야 하고, 왜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데..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그래서 '언어'는 믿을게 못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언어들을 가지고 산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이들은 모두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우리는 공통의 언어를 활용한다. '사진'도 (사진) 언어이고 '영상'도 (영상) 언어이고 '음악'도 (음악) 언어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말' 우리는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어를 쓰고, 이 한국어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말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상대에게 의미를 전달할까.


'남녀평등을 이루자고... 권위의식 있는 남자들 반성 좀 해라'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여기에는 불분명한 개념들이 많이 쓰인다. '남녀평등'의 개념, '권위의식'의 범주, 무엇을 '반성' 해야 할지 등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여지의 것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인터넷에 던져놓으면 개가 뼈다귀를 물어뜯듯이 달려든다. 각자의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래서 말은 불명확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듣는 이는 나의 의도를 100%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의 말은 우리를 기만한다.


우리의 말은 우리를 기만한다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글은 말보다 더하다. 억양조차 없는 이 텍스트들의 조합으로 우리는 의미를 전달하곤 하는데, 거기엔 오해가 남발한다. 손쉬운 예로 카카오톡에서 채팅을 할 때 이제는 말 끝에 이모티콘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모티콘을 붙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모티콘을 붙이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거나, 혹은 기분이 안 좋거나, 제시한 의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웃지 않으면서 채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웃음 이모티콘을 붙여야 한다. 특히 사업상 채팅처럼 조심해야 할 경우에는 더하다. 어떨 땐 무표정으로 웃음 이모티콘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


 하지만 이모티콘에 길들여진 지금의 인류에게 이모티콘을 쓰지 않음이란-특히나 웃는 이모티콘-난 기분이 얹잖다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모티콘으로 사회적 페르소나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역시도 언어의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가장 정확한 것은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다. 마음으로 깨달아버린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텃밭을 가꾸고 작은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나서야 자연이 주는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나와 자연은 아마 환갑이 넘을 때까지도 그다지 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자연이 고맙다'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공감할 껀덕지가 없다면 아무리 말과 글을 통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탐정의 후예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모든 것들은 스스로 깨쳐야 한다. 말과 글은 그 단서만을 던져주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여러 단서들과 경험들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가는 작업을 평생을 하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탐정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야지만 우리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진짜 의미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 

가장 초보적일 때 말로 배우고

조금 나아지면 글로 익히고,

본질을 깨닫으려면 마음으로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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