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녀

이별, 냉수 먹고 정신 차리기 #15

by 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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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이랑 인사동 카페에서 사주를 본 적이 있다. 다들 다양하게 가관인 사주들이 나왔고, 그중 내 사주도 가관이었다. 그 점쟁이분 말로는 ‘맛없는 사과’라 하였다. 결혼 후에는 유복하게 잘살지만 유혹 기술의 부재로 사주에 남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뒤늦게 간신히 결혼이나 한다는 얘기다. 내참.


점 봐주신 분의 멱살은 안 잡았지만 한참 동안 그분을 설득했다. 사주를 보시는 게 아닌 외형으로 보시는 거 아니냐며. 내가 바쁘게 나오느라 화장도 안 하고 흰 티에 흰 반바지 대충 입고 와서 이렇게 보시는 것 같은데, ‘나 유혹 잘한다’, ‘남자가 줄을 선다’ 라며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망언이었다. 결국 억지로 유혹 잘할 수 있는 걸로 사주를 바꿔주셨지만 이미 아무도 안 믿는 눈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 눈에 ‘사랑하기 힘든 나의 여건’이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나 싶다. 어정쩡한 철벽녀 스타일이 보였을 것이다. 멀쩡한데(이쁘다는 게 아니다) 연애 못하는 어설픈 철벽녀들의 모습이 이젠 내 눈에도 보이는데, 점쟁이분은 순식간에 캐치했을 것이다. 예전 회사 동갑 남자 동료에게도 철벽녀 같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기분 나빠해야 했는데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철벽녀가 좋았던 것 같다.


남자가 다가오면 본능같이 사랑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왜 난 본능같이 철벽 치기 바빴을까. 상대가 내 중심축을 흔들면 유연하게 그에 맞춰서 내 축을 그에게 보낼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난 흔들리는 축을 멈추게 하기 급급했다. 가끔 상대의 축을 흔들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유혹술의 부재였다.


심지어 철벽녀 들은, 아니 나는, 사랑에 빠지면 앞뒤 안보는 경우가 곧잘 있다. 그러니 간신히 천지신명의 축복으로 연애를 시작하더라도 의연한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랑은 쉽지 않았다. 헌신만 하거나(헌신했나...?) 도도한 척, 무례한 척만 하게 되어, 생각하는 연애가 잘 안되었다. 중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사랑하는 상대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주지 않았을까. 그게 이별의 요소에 한 부분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헌신도 마음껏 할 수 있는 만큼 모두 해주었다면 이번 이별이 이렇게 아쉽진 않았을 테다. 도도하고 무례했던 생각들이 떠올라서 이별이 더욱 어려웠다. 자신의 감정만 앞뒤 안 가렸던 뿐이지 여전히 상대에겐 어느 정도 철벽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난 남자와의 관계에서 뭐가 무서운 것일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들이 많은데,.. 뭐가 이렇게 내 용기를 막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만 적극적으로 보일뿐, 꽤 심한 방어적 인간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연애 못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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