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네요 Jun 15. 2017

게으름의 행복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9







 요사이 ‘게으름’이란 단어에 빠져 있었다. 저성장 시대니, 4차 산업시대니 예전에 정답으로 알던 것들이 더 이상 정답이 아닌 시대가 왔다.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덕목들이 대두되는 요즘, 내 눈에 가장 띄는 것은 ‘게으름’이었다.      


 버트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 피에르 쌍소의 <게으름의 즐거움>, 요 근간 이슈가 되고 있는 이 책들 제목만 들어도 왜 이리 기분이 좋은 지... 뭔가 이 책들만 있으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게으름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난 이 책들 제목만 알뿐이다. 어려워 보인다.     


 백수가 된 요즘 ‘게으름’을 문제없이 누리고 싶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읽을 책들을 준비하여 혹여나 발생할 죄책감과 면박꾼을 몰아내려 하였고, 혹시 주변에서 잔소리를 듣게 되면 그에 반할 멋진 말을 준비해보곤 하였다. 게으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는 다른 말은, 눈치보기 싫다는 것이다. 남의 눈치와 내 안의 눈치 모두 보기 싫었다.     


  ‘게으름’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봤는데, 뻔한 글이 되어 재미가 없었다. 요즘 사람들 똑똑하다. 게으름의 중요성을 잘들 알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를 또 하는 꼴이라 지워 버렸다. 경제 여건이 안 되어 게으름을 못 누리는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서도 써보고 싶었지만, 지식이 부족하여 머리에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게으름에 대해 당당해질 수 있는 글을 써놓고, 마음껏 게으름을 누리고 싶었는데 이 또한 맘대로 되지 않았다. 시간만 꽤 흘렀다.    

 

 하루 종일 여유로운 날에도 글이 안 나왔다. 글은 안 쓰고 컴퓨터 앞에서 딴 짓만 하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을 몇 시간 씩 하거나,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천장을 바라보곤 하였다. 영드 셜록을 다시 시청하였고, 생각나는 사람을 주구장창 머리에 떠올리곤 하였다. 하루 죙일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이 감정 저 감정을 누리며 해가 떴다 지는 것을 느꼈다. 맛있는 것을 만들 때와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만, 바쁘게 행동하였다.     


 그러다 문득 알게 되었다. 

 이미, 아무런 거리낌 없이, 완벽히, 게으르고 있었다는 것을.


 게으름이란 것이 막상 겪으면 심히 불편할 거라 생각했다. 눈치 보이고 나 스스로도 거북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개뿔, 언제 와 있는지도 모르게, 게으름은 내 옆에 오래된 파트너처럼 자연스럽게 누워 있었다.     

 

 글이 안 써지는 이유는 게으름을 아직 ‘이해’ 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이미 ‘게을러서’ 못쓰고 있는 것이었다. 게을러서 책들도 아직 안 읽었다. 시작도 안 했다. 이렇게 되니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나 싶다. 이렇게 본능적으로 게으름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구태여 머리 아플 필요가 있을까.     


 문득 초등학교 때 개학 전날이 떠올랐다. 언니는 방학숙제 때문에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방학숙제를 못 끝내면 학교를 안 간다 하였고 울고 불며 엄마에게 끌려간 적도 있었다. 덕분에, 나와 동생까지 언니 숙제를 돕곤 하였다. 그래서 개학 전날엔 나까지 엄청 긴장이 되었다. 내 방학숙제도 그 분위기 덕에 기를 쓰고 하였는데, 역시 다 하지 못하였고 불안한 마음과 함께 다음날 등교하였다. 못한 부분에 한해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았다.     


 이때 나름 깨달음이 있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기를 쓰고 해야 하는 끔찍한 방학 숙제는 손바닥 몇 대만 맞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손바닥 몇 대 맞을 때의 스트레스쯤은, 가혹한 방학숙제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방학숙제 걱정은 많이 줄어들었고, 걱정 없이 맘껏 게으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게으름으로 행복했다. 왠지 이 게으름은 내가 쟁취한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방학숙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위주로 하고, 많이 부담되는 것은 안 했다. 물론 개학 전날 하루 동안 월요병과 맞먹는 묵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했지만 학교 가서 몇 대 맞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다 잊었다. 굳이 게으름은 배울 덕목이 아니었다. 난 이미 게으름을 능숙히 다룰 줄 아는 천상 게으름뱅이였다. 주변의 시선 따위 개학날 손바닥 맞는 것처럼 별거 아니라는 걸, 어릴 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근 한두 달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오랜 시간 동안 왜 게으름에 불편해 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릴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게으름의 행복’을 왜 잊고 있었을까. 그동안 무슨 교육을 받았기에 주변 눈치와 자기검열로 ‘게으름의 행복’을 이렇게나 하찮게 여겨 왔을까. 성실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잘못된 것으로만 ‘게으름’을 취급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일 중 ‘나를 찾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나를 찾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게으름’을 찾으면서, 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      


 지금껏 무심코 잊혀진 어떤 경험적 사실(기억)을 재평가하고, 절대적 진실이라 여겨진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심코 잊혀진 ‘게으름의 행복’이라는 경험적 사실을 재평가하고, 절대적 진실이라 여겼던 ‘게으르면 나쁜 사람’이라는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변 눈치’와 ‘자기검열’은 마치 다른 사람이 내 삶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내가 사회의 유닛이 되느라 잊고 있었던, 내 본모습을 찾는 데부터 시작해야 하나보다. 사회에서 규정된 보편적 어른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님을 알아 가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된다.  

   

 하아, 너무 어려운 말을 많이 썼더니 게으름이 마구 밀려온다. 성실한 척한다고 성실해지는 게 아니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게으름을 부려야 성실함이 나온다(이 말을 쓰는 데 엄마의 등짝스매싱이 떠오르는 건, 내가 효녀라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성실해 지기 위해

한숨 

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