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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네요 Aug 27. 2017

내 머릿속의 고구마 백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10








 난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다. 인터넷에 떠돌던 아재 입맛 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베어 그릴스(야생에서 뱀 먹는 아저씨)가 나왔다. 비위도 강해서 못 먹는 음식이 많지 않다. 소화기관도 타고났다. 먹은 걸 다 소화시키다 보니 덩치도 좋다. 그리고 새로운 음식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과일보단 해산물과 고기를 좋아한다. 날것과 내장을 좋아한다.     


 이런 식성의 치부(?)까지 드러내며 하려는 이야기는, 내 폭넓은 식성에 비해, 편식이 심한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난 슬픈 영화 보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무서운 영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사실 감정적으로 더 싫은 것은 슬픈 영화이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도 조금 꺼려한다. 그러다 보니 코믹과 액션 영화를 좋아하고, 감정선이 자극적이지 않은 수필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작년 제일 재밌었던 영화는 ‘최악의 하루’였다. 


 ‘군함도’를 보고 싶지만 벌써부터 그 억울함이 느껴져 엄두가 안 난다. 심지어 ‘옥자’조차 못 봤다. 해피엔딩이지만 슬프다는 평을 보고 난 후, 보고 싶지 않았다. 감정의 골을 깊게 내는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느낌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생활이 괴롭다. 싫은 느낌을 넘어 두려운 느낌? 내 최악의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이다. 


 그렇다고 슬픈 걸 무조건 싫어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내 핸드폰에 있는 많은 노래들은 꽤 구슬프다. 마구 ‘나 슬프다’ 부르짖는 노래들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슬픔을 모티브로 한 노래들이다. 심지어 이런 노래를 들으며 우울한 감정에 빠지는 허세를 즐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 같이 슬픈 감정 전달이 순식간에 다다르는 매체를 접할 때나, 책이나 만화책의 경우도 심히 억울한 이야기가 나오면, 보지 못한다. 가족의 죽음을 소재로 다루는 이야기나 울기 위해 만든 최루성 이야기도 싫어한다. 감정이 강요되는 듯한 스토리를 싫어한다. 일제강점기나 나치 관련 영화도 쉽게 볼 생각을 못한다. 고구마 수 백 개가 목에 걸리는 느낌을 차마 넘길 수가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중, 머리에 확 스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날은 언니, 나, 남동생 셋이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 화를 보던 날이었다. 나는 만화를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이 만화는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평화로운 어느 가족의 잔잔한 스토리 같았지만, 고달픈 어른의 힘든 삶을 예쁜 그림으로 보여주는, 그런 만화였다.     


 이 만화가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마지막 화 때문이다. 단순히 구슬픈 엔딩으로 기억될 수 없는 거의 감정의 폭력 수준이었다. 대충 기억나는 것은, 할아버지가 죽은 후, 홀로 된 네로가 동네에서 억울한 누명(?) 같은 걸 쓰고, 추운 날 밖으로 쫓겨난다. 잘 그린 그림도 대회에서 떨어진다. 도와주는 이 아무도 없는 비참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반전되어 누명 쓴 일도 해결되고 그림도 높게 평가된다. 잘 될 일만 남았는데, 그것을 모르는 고구마 네로는 거대한 명화 앞에서 결국 추위에 쓰려진다. 한층 더 비참해진다.


 삼 남매 모두 숨을 죽이고 벽에 붙어 있었다. 눈물이 그렁거렸지만 꺼이꺼이 울지는 않았다. 우린 아주 애기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있을 무렵, 플란다스의 개 작가는 추가 폭탄을 하나를 더 터트린다. 파트라슈가 네로를 찾아와 같이 얼어 죽게 되는 것이다. 흡사 아이와 개가 함께 자살하는 장면을 보는 듯했다.


 생각지 못한 스토리에 벽을 부여잡고 바들바들 떨며 울었다. 삼 남매가 모두 벽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그날 그 만화 장면과 함께, 방안 풍경이 기억난다. 엄마, 아빠는 옆 온실에서 작업 중이셨고 방안엔 우리만 남아 있었다. 따스히 노을이 들어오는 안락한 공간에, 삼 남매는 무서운 영화를 보듯이 끔찍해하고 있었다. 만화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 말 못 하였다. 끝나고 난 후, 간신히 수다 떨었던 기억이 난다. 개까지 죽인 만화 너무 싫다고 욕을 욕을 했었다.     





 아이들이 보는 전래동화는 실제 매우 잔인하다. 동화로 각색되어 무섭게 표현되지 않았을 뿐, 사지가 뜯기거나 잡아먹히는 일이 다반사다. 우리나라 '해님 달님'을 보면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며 엄마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떼어먹다가, 다 먹고서는 집안의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러 들어간다. 어떤 버전에서는 집안에 들어간 호랑이가 오독오독 뭔가를 어둠 속에서 씹어 먹는 이야기도 있다. 그 버전에서는 남매가 아니라 3남매인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애기부터 잡아먹고 나머지 아이들을 꼬시는 스토리다.   

   

 이런 무서운 전래동화를 들으며 아이들은 미리 대리 경험을 한다. 심적 대비 훈련이랄까. 위험을 헤쳐나가는 주인공을 보며, 아이들도 무서움을 견뎌낼 힘을 기르는 것이다. 슬픈 동화도 마찬가지란다. ‘인어공주’가 생각난다. 이 동화 역시 속 터졌지만 영상이 아닌 글이어서 그랬나, 조금 이야기를 알던 상태에서 글을 읽어서 그랬나, 플란다스의 개처럼 충격적이진 않았다(참고로 안데르센은 '내 글은 아이들이 읽는 글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어공주가 일부 예민한 아이들에게 과연 괜찮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그에 비해 플란다스의 개는 19세 이상 호러물을 9살짜리가 본 것처럼 끔찍했다. 주인공은 참혹한 환경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헤어 나올 수 있는 타이밍에, 시청자들을 놀리듯, 작가는 주인공을 죽여 버렸다. 할아버지, 아이, 개, 모두 죽여 버렸다. 이쯤 되니 작가가 새디스트 아닌가 의심된다. 볼 당시에는 허구의 이야기라고 위로하며 볼 수 없었다. 바로 빠져들었고 감정이 요동쳤다.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아이들에게는 그냥 처절한 순간이었다. 난 처절했다. 아무리 그림을 예쁘게 꾸며 그린들, 갑자기 아이와 개가 죽는 장면을 맨 정신으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때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닌가 의심해 본다. 이것 하나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요 근간 ‘행복은 많은 감정을 느끼는 일에 있다’라는 글에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기쁨의 감정만이 행복은 아니라는 말도 공감되었다. 

     

 어느 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울적한 노래 하나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줄 때가 있다. 기쁨은 아니다. 슬픔과 비슷한 매우 우울한 감정이다.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자책에 빠져있지만, 노래에서 나오는 슬픈 감정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온전히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럴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런 '모자란 나'자신이 '멀쩡한 나'일때 느끼지 못하는 다른 감정을 공감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위로받는 순간이고 행복한 순간이다. 밉던 내가 사랑스럽게 되는 순간이다.

     

 파트라슈와 네로의 죽음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싶진 않다. 하지만 슬픔은 온전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다가올 슬픔에 대한 심적 대비 훈련은 하고 싶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나의 탁월한 소화기관처럼 감정들을 하나하나 소화시키고 싶다. 쉽지 않은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감내하며 공감하고 싶다. 목구멍에 걸린 고구마를 삼키게 되었을 때, '슬픔'이라 하여도 그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공감한 감정들을 울음과 분노, 기쁨과 웃음 등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 감정들로 위로받고 싶고, 위로해 주고 싶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위로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든 나 자신에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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