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11
짤방 글을 보던 중 한 아가씨의 글을 읽었다. 거래처에서 스트레스받고 늦은 점심을 하러 갔다가, 식사가 잘못 나와 짜증 났다는 글이었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주문을 잘못 받으신 거였다. 귀가 어두우시면 장사하지 마시라고 장난하냐며 따졌다고 쓰여 있었다(쎄다). 할아버지께선 할머니가 요리는 잘하신다며 죄송하다고 다시 가져다주겠다고 하였지만 결국 한술도 안 뜨고 일어나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위로해달라는 글을 썼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은 상황이었다. 이 아가씨는 오히려 화가 더 나서 4시간 뒤에 글을 또 썼는데, 본인은 납득이 안가 남자 친구에게 한번 더 물어보겠다는 글을 썼다.
나는 이 아가씨를 욕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다. 왜 이 아가씨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궁금한 것이다. 심지어 남들에게 욕을 먹어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그 기준이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여기서 내가 근간에 겪었던 일과 같이 생각해 보았다.
요전에 아는 친구와 연극을 보러 갔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예약 티켓팅 줄이 앞뒤로 여전히 길었다. 표를 끊고 공연장으로 들어가려 하니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공연이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소리가 터졌다. 입구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앳된 여자 둘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은 아가씨들은 위축되었지만 그나마 일을 처리해 보려고 이런저런 상황 설명과 해결책을 말했다.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짜증을 내던 사람들은 이제 그 아가씨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을 이따위로 해서 되냐며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나와 친구는 조금 후에 전화번호를 적어준 후 연락 달라고 하곤 시끄러운 그곳을 나왔다. 연극은 전액 환불을 받았고 무료로 다시 볼 수 있었다.
이번 경우, 사실 내 행동의 변화에 조금 신기했다. 대략 5년 전이라면, 부끄럽게도 나 자신도 저 무리에 껴서 아르바이트생을 다그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진 않아도 어디 가서 잘못된 일에 관하여 따박따박 따지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어릴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심한 시골 여자아이였던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달라진 것이다. 뭔가 그때는 그것이 배짱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왜 안 그랬을까? 뭐가 달라진 걸까? 이제 착해진 건가?........ 이건 아닌 것 같다.
딱히 전과 달라진 건 없는, 돈 없는 나이 든 백수 여자가 나다. 느긋한 척하는 불안한 사람인데, 저런 타인을 배려할 만큼 여유가 없다. 자학이 아니다. 요즘 그렇다는 것이다. 욱도 잘하고 일정 수준의 화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더욱 의문이 들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화가 안 났다. 물론, 일을 이렇게 만든 극장 대표나 주인에겐 화가 나서 지랄하고 싶었지만 앞에서 진땀 빼는 어린 두 아가씨는 안 되어 보였다.
뭐가 달라진 것일까. 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킬만한 큰 사건은 없었는데. 무슨 깨달음을 얻을 만한 사건도 없었고 배움도 없었는데, 내 감정은 왜 달라졌을까.
문득 예전 철학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감정의 소모가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성격, 윤리까지 바뀔 수 있음을 얘기하는 수업이었다.
서비스 업종의 감정노동자들의 폐해는 많이 거론되었다. 심각하다. 그런데 일반 회사를 다니는 직종에서도 감정의 소모는 거의 매일 일어난다. 직장을 다닐 당시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비상식적인 상식들이 지금 생각해보니 내 감정을 갉아먹었었다. 수직상하관계가 뚜렷한 곳에서는 뻔하게 일어나는 군대식 비상식들이 만연하였고, 나름 좀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사무실이라 하여도 서로 직무에 경쟁관계에 들어서면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들로 감정을 소모하게 된다.
특히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감정노동자들의 스트레스처럼 감정을 많이 소모하게 된다. 납득되지 않지만 참아야 하는 부분들이 많다. 일일이 경험한 예시를 쓰다가 지워버렸다. 글이 너무 길어지고 욕이 나와서 차마 글을 맺을 수 없을 것 같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굳이 예시를 안 써도 다들 알 것 같다.
이렇게 회사에서 소모된 감정은 한 사람의 감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감수성이 사라지고 동정심도 사라지고 이성이 그나마 자리를 잡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흄이라는 철학가에 따르면 동정심이야말로 도덕성의 참된 근거라 하였다.
이성은 참과 거짓을 발견하는 능력으로 활동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감각인데 그것이 도덕감이라는 것이다. 도덕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전제로 한다. 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 자기도 가슴 아프게 느끼고 타인이 기뻐하는 것을 볼 때 자기도 기뻐할 줄 아는 공감과 동정심이 없다면 결코 선한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도덕과 윤리가 된다는 것이다. 원래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의 동정심이 윤리라는 것이다.
맨 처음을 이야기한 식당 아가씨의 경우 거래처에서 잔뜩 자신의 감정을 소모시킨 후 동정심과 감수성, 공감감이 바닥난 상태에서 식당에 들어갔다(그날 하루 만에 감정이 모두 소모한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옳고 그름은 식당 경영능력 유무(청각능력이 있느냐, 실수를 하느냐 안 하느냐)였다. 그녀의 옭고 그름의 기준엔 동정심이 적었다. 동정심이 줄어든 그녀의 옳고 그름은, 왜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경우, 직장을 그만둔 지 근 5년이 넘었고, 가게 일은 감정 소모가 거의 없었다. 손님을 상대하지 않는 온라인 가게인 데다 꽃 사는 사람들은 다 착하다. 신기하다. 심지어 요근간엔 나름 별일없이 놀고 있다. 힘든 시집살이나 결혼생활, 육아 이런 거 일절 없이 너무나 별거 없는 무료한 하루를 살다 보니 감정의 소모 또한 없었던 것이다. 착해진 게 아니고 그냥 예전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니 극장에서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화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아주 예전으로 다 돌아간 것 같진 않다.
회사 다닐 땐 동정심이나 감수성이 불편할 때가 있었다. 신입사원들이 겪는 직장 사춘기(심하게 알았다)가 단순히 미래의 기준이 바뀌어 사춘기가 온다는 설도 맞겠지만 직장에 들어가면서 원치 않는 많은 감정의 큰 소모를 겪게 되며 사춘기가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서서히 감정의 소모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회사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야 하는 갑질의 기준이 생기는 것이다.
위의 두 사례는 일종의 갑질이다. 물론 회장님들의 갑질과는 결은 다르지만 동정심과 공감감을 잃은 도덕감 부족에서 오는 갑질임은 틀림없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신경증적 방어기제로서 나오는 갑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위의 두 사례는 약간의 소시오 패스 경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이코 패스와 같이 등장하는 단어라 무섭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감정을 소모하는 것에 너무 대책이 없었던 것 같다. 사회분위기 또한 바뀌어야겠지만 나 스스로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감정의 소모에 대응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다음번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갑질 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러지 마시라고 용기를 가지고 싶은데,
하아 이젠 용기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