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직격탄을 뚫고 우리나라 최고의 공기업에 어렵게 취직한 한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놨다.
합격한 공기업은 지방에 있었다.
첫 자취, 자연에 휩싸인 지역. 낯설었지만 설레고 신선한 느낌이 가득했다고 한다.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진 건 한 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다양한 직급의 사람들이 한 파트에 있는데, 그 파트를 주름잡고 있는 제왕은 다름 아닌 친구보다 몇 살 어린 20대 중반 여자직원A이다.
A : “**씨, 이거 제가 아까 하라고 했는데 다 하셨나요?”
A : “**씨, 이 업무까지 다 하시고 퇴근하세요.”
나이는 어리지만 3년 먼저 입사한 선배인 A로부터 업무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 입장었다고 한다.
모든 업무를 빠삭하게 꾀고 있는 그녀가 처음에는 멋있어 보였기에,
명령어조의 말에도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잘 따랐다고 하는 친구는 점점 사람을 하대하는 A의 태도에 지쳐갔다.
조금만 실수해도 다른 사람들 듣기 무안하게 큰 소리치고 날뛰는 A를 보며, 회사에 앉아있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는 나의 친구.
이야기를 듣다보니 친구의 입장이 너무 안타까웠다.
A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대략 이렇다.
1) 꼬봉 B : A의 동기이자 그녀를 띄워주는 하수인 격인 꼬봉 역할
2) 남자동기 C : 친구의 동기였으나 친분이 없는 상태, 눈치빠른 C는 A의 환심을 사기위해 매일같이 뇌물을 바치며 사바사바 하는 상황
3) 과장, 차장급 윗 사람들 4명 : 그녀보다 늦게 이 그룹에 오게 되어 업무를 끊임없이 A에게 물어보고 있는 상황, 매번 보고서를 만들어야하는 입장에서 그들에게 A는 없으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렇다. 예전의 내 상황과 비슷했다. 상급자가 처음 업무를 익힐 때, 업무를 많이 알고 있는 직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손이 빠르고 수많은 히스토리를 알고 곧바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먼저 입사한 A는 다른 그룹 상사들에게서도 어리지만 당당하고 똑부러지는 이미지를 쌓아놓고 있었고, 다른 그룹의 동기들에게도 선심을 써가며 (앞과 뒤가 다른)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난 친구에게 말했다.
“동기들 몇십명 된다고 그랬지? 지금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봐.”
친구는 말한다.
“몇 십명 함께 입사했지만, 친한 동기는 4-5명 정도야. 게다가 층이 달라서 회사안에서 거의 못봐. 다들 너무 바쁘거든”
타 지역에서 외로운 감정과 회사 스트레스를 털어놓을 사람 없이 하루하루를 버텼던 친구는 1년을 좀 넘게 겨우 다니다가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공기업, 그 자리를 위해 몇년을 달려왔던 친구.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공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는게 믿기지 않았다.
A는 자신을 이렇게 칭했다고 한다.
“나 없으면 여기 안돌아가. 하하하”
“나는 여기 있기 아까워.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하나”
그녀는 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먼저 들어왔기에 남들보다 업무를 가장 많이 폭넓게 알고 있는 것 뿐이다. 그녀도 다른 그룹에 가면 초짜가 되고 초보가 된다. 그것을 언젠가 인지하게 되면 저런 말을 했던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고졸 이상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무직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앞과 뒤가 다른 이미지로 다른 그룹에까지 인맥을 넓혀놓은 그녀 A,
A는 유독 착하고 약한 내 친구를 업무적으로 인간적으로 교묘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업무를 인수인계서도 없이 한 번만 알려준 후, 실수가 날뻔한 상황조차 모두 캐치해서 친구의 능력을 깎아내리고 가스라이팅을 시켰다는 A.
복잡 미묘한 상황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조차 없다고 하는 친구를 보니 너무 마음이 안좋았다.
매일 밤마다 호흡곤란 증세까지 겪다가 결국 정신과를 찾게되었다는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인사팀에 끊임없이 다른 그룹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할 것, 그리고 친구의 존재를 모르는 동료들이 많으니 다른 그룹 사람들과 밥도 자주 먹고, 사내 동호회도 들고, 업무 협업 기회를 갖으며 이미지를 쌓아갈 것.
물론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수도 있는 일이기에 버티는 기간동은 무척 괴로울것이다.
난 친구에게 차마 버티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나는 친구에게 조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나를 지킬 줄 몰랐던 것 같아.. 그때를 생각하면 미화될 수가 없을만큼 지금도 소름 돋을 정도니까. 도저히 다시 돌아갈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운 시기야.
방법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를때까지 버티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너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파악하고 주변 인맥들을 많이 다져놓았을 때, 그 때는 부당한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분노해도 돼. 다른 사람들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아니까. 분명 너의 입장을 들어주고 너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 때가 될 때까지 네 이미지를 잘 가꿔놓고, 주변 사람들을 잘 만들어놓는 연습을 해야해. 시간을 길게 갖고 버텨야 한다는 답변을 줄 수 밖에 없는데.. 나도 사실 추천하지 않아.”
교묘하고 복잡한 조직 내 인간관계 그리고 암묵적으로 정해져있는 서열.
공무원은 서로가 그 자리를 나갈 생각을 안하는만큼, 대부분 보직이 순환율이 적은만큼,
파트별 문화와 분위기가 앞으로 회사생활의 모든걸 결정한다.
결론은 사람이 힘들면 모든것이 고통스럽다.
죽어라고 공부해서 들어간 곳이 천국이 아닌 지옥이었을 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작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친구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인품 훌륭하고 똑똑함까지 갖춘 그 친구는 결국 회사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대한민국 청년들이 대기업과 공기업 입사준비에 몇년씩 쏟아붓고 있다.
한번쯤은 생각해봐야한다.
그 도착점이 내가 바라던, 내가 생각했던, 내가 선망했던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