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은 모두 앓아봤다는 코로나,
가족도 동료도 동기도 지인도 모두 한 번쯤은 거쳐갔다는 코로나는 늘 나를 거르고 지나갔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 3년이 지나도 걸리지 않게되자 내겐 슈퍼면역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인들은 무증상으로 지나갔을것이 분명하다면서도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지하철에서도 엘레베이터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있을즈음,
맨얼굴을 드러내는 신세계에 나 또한 합류하자마자, 코로나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주 세게.
어느날 저녁이었다.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책을 읽는데 으슬으슬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책에 심취해있던 나는 '조금만 더 읽어야지... 조금만 더.. ' 생각하다가 예사롭지 않은 몸의 떨림을 느끼고 베란다 문을 닫았다.
이미 취침시간을 훨씬 넘긴 새벽 2시, 몸의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서둘러 방에서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음에도 벌벌 몸을 떨며 일어났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게 추웠다.
다들 덥다고 하는 와중에 나는 가디건까지 걸치며 왜 이렇게 춥냐고 외쳤다.
아무래도 몸이 너무 이상했다. 오늘 하루는 무조건 푹 쉬겠노라 다짐했다. 아니 무조건 쉬어야했다.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태,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 상태임을 직감했다.
한참 자고 일어난 후 저녁이 되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근육통이 왔다.
근육통.. 몸이 간지럽게 아팠다.
머리도 간지럽게 아팠다. 가족들에게 제발 내 온 몸을 주물러달라고 소리쳤다.
팔과 다리, 등.. 온 몸을 주물러주는 가족들의 마사지를 받으며 나는 잠들었다.
하루빨리 생각없이 잠드는게 인생의 이득이라고 느꼈다.
다음날 새벽, 난 다가오는 고통에 본능적으로 잠에서 깼다.
침을 삼키는데 목이 부어서 아팠고, 온 몸에 힘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였다.
목이 퉁퉁붓고 몸이 아프다..설마..
본능적으로 코로나 키트로 검사를 했다.
두 줄이 떴다.
코로나 기간동안 수없이 많은 검사속에서도 한 줄을 굳건히 지켜왔던 이 키트가 선명한 두 줄을 나타냈다.
지독한 감기, 독감에 걸렸을적 '코로나 1호가 되는건 아닐까'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였을때도
늘 한 줄로 안심을 줬던 이 키트가 이렇게 끝물즈음 내게 두 줄을 보여준다.
일어나자마자 회사에 코로나 확진을 알리고, 온 힘을 다해 씻고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코로나도 다 끝나가는 상황이라는데 웬걸.. 진료 시작전부터 앉을 공간도 없을만큼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 몸에 고통의 서막이 드리우고 있었다. 도저히 서서 기다릴 기운이 없었다.
힘을 단축시키고자, 서둘러 주변 이비인후과 4군데에 전화해서 대기시간을 묻지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15명정도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울다시피 물어봤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지금 여기 주변 이비인후과에 4번째로 전화드린건데요.. 대기자가 너무 많아요.
저 너무 아파서 진료를 빨리 받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생존의 위험이 다가오는듯한 나의 고통을 전혀모르는듯 직원은 웃으며 말한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많네요. 먼저 오신 분들부터 진료받아야죠."
유난히 작은 상가의 엘레베이터를 탔다.
5명정도 타면 꽉 찰만큼 매우 작은 공간, 마스크를 쓰고 고통스러운 내 몸을 부여잡고 있는데, 사원증을 맨 2명은 노마스크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대담하다고 느꼈다.
'지금 내가 마스크를 벗으면.. 저 사람들은 꼼짝없이 코로나에 걸리겠구나..'
그렇다. 코로나는 끝난게 아니었다.
온 힘을 다해 질질 몸을 끌고, 또다른 이비인후과에 도착하여 진료접수를 했다.
다른 병원들은 한산한데, 하필 오늘 이비인후과만 바글바글한 이유는 뭘까.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도저히 1시간을 기다릴 여력이 없었다.
'아직 코로나 확진받기 전이니까...'
무작정 바로 앞의 내과로 들어가서 몸이 아프다고 하니, 의사는 코로나에 관련하여는 묻지도 않는다.
너무 아프면 수액을 맞고 가라고 하길래, 냉큼 빨리 맞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1시간정도 수액을 맞은 후 몸이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코로나 최종확진을 받고 집에 오는 길, 햇살이 유독 뜨겁게 나를 비췄다.
다음날 악몽을 꿨다.
나는 일본에 간 한국인 교환학생으로, 그 날은 청소당번이었다.
대걸레를 들고 청소를 하러 가는데, 일본 일진이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사악한 미소를 띈다.
곧이어 나를 괴롭히기 위해 따라 나와 순식간에 내 옷을 붙잡고 어두운 곳으로 끌고간다.
큰 공포감에 온 힘을 다해 눈 앞에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살려주세요!!!"를 외치려는데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귀신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목을 마구 긁고 있는 듯한 공포감과 함께 덜컥 잠에서 깨어났다.
고통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머리가 깨질듯 아팠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본능적으로 어제의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39도가 다 되어가네요. 아프겠어요. 수액이라도 맞고 가시겠어요?"
"네, 제일 비싼걸로 맞을게요."
수액 가격은 15만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난 죽기 직전이었다.
2시간 넘게 해열제, 비타민 등의 성분이 들어있다는 3개의 수액을 맞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액이 바닥을 보일즈음, 열도 내렸고 몸도 가벼워진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감사함이 느껴졌다.
그때 그 시절, 코로나 환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때, 자택에서 홀로 이런 고통을 겪었을 이들을 생각하니 지금 내 현실이 감사했다. 뒤늦게 걸렸지만 나를 받아주는 병원이 있다는게 너무 감사했다.
다음날, 미열증세와 함께 숨쉬는게 힘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찌그러지듯 아파왔다.
본능적으로 폐에 문제가 생겼을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서웠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코로나 폐섬유증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나온다.
나를 유일하게 받아주는 이비인후과로 곧장 향했다.
"숨 쉴때마다 너무 아파요. 아무래도 폐 CT를 찍어야할것 같아요."
의사는 청진기로 내 몸 여기저기를 재더니 말한다.
"폐에 문제가 있다면 청진기에서 호흡의 문제가 느껴져야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정상입니다. 딱히 CT를 찍을 이유가 없어요"
안도감이 들면서도 이 고통이 하루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기침, 가래, 근육통, 발열, 목 통증, 후각/미각 상실.. 코로나의 모든걸 다 겪게 되었다.
면역력 약한 노인이었다면.. 유아였다면.. 이 정도의 고통은 사망에 이를것이다.
휴가 5일동안 수액의 힘으로 공원을 걷거나, 쉬거나 잠을 자는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5일정도가 지나자 코로나 키트에 한 줄의 음성이 떴으나, 완치는 아니었다.
2주동안 이어진 피로감, 무기력증은 나의 작은 의지마저 다 꺾어버릴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면역력이 상당히 떨어져버렸다. 내 몸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낀다.
또한 감기, 몸살, 잔기침, 100% 돌아오지 않은 후각과 미각을 달고 살아가고 있다.
이젠 몸 회복이 우선이다.
자연의 풀내음을 느끼며 공원을 걷고, 근력 운동을 하고, 비타민을 챙겨먹으며 정상의 몸으로 회복시키고자 노력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