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의 괴로움

북 코디네이터의 투덜투덜 책사랑 이야기

by 이화정


사실은 각 잡고 근사하게 책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심오하고 경이로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매혹되는 책 세계, 야심 차게 목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9월의 마지막 날, 가을 햇살이 카페의 야외 테라스로 길게 늘어지고 있었고, 다이어리 한 면에 책의 소제목이 될 목록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흠, 매체와 장르를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책 이야기라니, 잘만 쓰면 대박 나겠어.


글쓰기 모임 준비를 하면서 펼친 <창의적 생각의 발견, 글쓰기>를 읽다가 갑자기 쓰기 시작한 터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흡족했다.


오.... 제목의 힘인가? 진짜 이렇게 창의적일 수가 있나! 흐흐흐. 역시 책의 힘은 대단해!


브런치북 공모전 소식을 보고 일주일째 갈팡질팡하고 있던 차였다. 어쩌다 책을 세 권이나 낸 작가가 된 나는 습관적으로 네 번째 책 구상을 하고 있었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세 번째 책 원고를 쓰던 괴로움이 아직도 몸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붙어 있어 가끔 부르르 몸서리를 치면서도 또 책을 쓰겠다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새 책에 대한 열망이 불쑥 올라오곤 했다.


그림책 이야기를 써 볼까. 아니야 이미 너무 많은 걸. 독서모임 매뉴얼 북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책을 깊이 읽는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는 어떨까?


머릿속 서랍을 정신없이 열어보다가


아, 몰라. 책을 또 어떻게 쓰라고!


하루에도 몇 번 도전해 보자, 말자 하며 괴로워하던 날들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다시 펼쳐 든 책이 자꾸만 글을 쓰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예술은 우리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길 뜻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 걸까? 우리는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으니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뭔가를 찾는다. 오비디우스의 걸작이 날 변화시켰듯이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135-136쪽


악! 이건 뭐지 운명인가. 방금 영화, 그림을 보다 책장을 샅샅이 훑어보며 관련 책을 찾던 순간들 혹은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가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목차를 완성했는데...

나에게 책 읽기는 무슨 의미였던가. 나란 인간이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가 궁금해서 읽거나,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에 질식할 것 같아 산소호흡기를 쓰는 심정으로 읽지 않았던가. 근데 이 저명한 소설가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벵골어와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세계의 언어인 영어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다 이탈리어를 글쓰기를 시도하며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묘하게 나의 책 읽기와 글쓰기 분투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코를 박고 읽던 중이었는데 이 문장은 무엇?


브런치북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카페를 나온 나는 일산 교보문고를 향했다. 줌파 라히리를 변화시켰다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당장 따라 읽고 싶어서였다.


아뿔싸. 벽돌 책이로군. 흠, 우선 님프 다프네가 아폴로 신을 피해 도망치다 나무로 변신한 이야기부터 읽어보겠어..... 다른 페이지들도 어디 보자. 으으으 읽을 수 있을까.

슬그머니 책을 내려놓고 신간들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매대만 해도 수백 권의 책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검색대로 가서 내 책을 입력하고 위치를 확인했다. 초기화시키려다 잠시 멈칫.


누가 검색하려고 왔다가 이 제목이라도 보게 내버려 둘까? 아니야. 기본 예의를 지키라고.

6월 출간 후 매대 위에 며칠 누워보지 못한 채 책장으로 자리를 옮긴 내 책은 다른 책들 사이에 끼어 다소곳이 책등을 보이며 꽂혀 있었다.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집으로 돌아와 분주히 저녁 밥상을 차렸다.


책상에 앉아 오후에 쓴 목차를 훑어보다가 뭐부터 써야 하나 들여다보는데 낮에 의기충천했던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막막하기만 했다. 드라마 한 편을 볼까 하다가 요즘 빠져서 보고 있는 『인간실격』 드라마 이야기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번뜩.

사놓고 몇 년이 지난지도 모르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책을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새 글의 전개 방식이 어떻게 흘러갈지 감을 잡아보는 셈 치고.

으으으으 이게 뭐야. 재미없는데? 이 사람 뭐야. 왜 이리 비뚤어지는 거지?

어디까지 망가지는 거야? 으으으 음울해.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지만 여자를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야? 고전은 정말 고전하며 읽어야 되는 책인가!!!

그러면서 전도연과 류준열이 등장할 때마다 느껴지는 허무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걸 어떻게 글로 써, 안 되겠다. 드라마와 책의 연결고리를 찾기는커녕 이 고전이 뭐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조차 헤아리지도 못하겠구먼. 쯥.

완독주의의 고질병이 아직 완치되지 않았는지 꾸역꾸역 <인간 실격>을 다 읽었다. 뒤에 실린 『직소』라는 작품은 읽지도 않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우연히 걸려든 영화를 한 편 보기 시작했으니, [유열의 음악 앨범].


이 맥락 없는 인간 같으니라구. 엉엉.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아슬아슬 마음이 아린 게냐.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여기는 사람과 달리 너무나 인간답게 평범하게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이 젊은이를 어쩔... 흑흑 글쓰기 프로젝트고 뭐고 산다는 건 참 애잔하고 복잡스럽구나.

10월의 첫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메모지에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내가 쓰고 싶은, 아니 쓸 수 있는 건 이런 거였어.

책읽기의 괴로움!!!

나는 책이 좋아 죽겠어서 읽지만 그만큼 괴로운 순간도 많다.

읽다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할 줄 모르겠어서 괴롭고, 도대체 뭔 소린지 몰라 답답해서 미치겠고,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 슬프고, 책값이 감당이 안 돼 불행하다.

다시 책을 뒤적이다 이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나는 혼자라는 걸 느끼기 위해 글을 쓴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는 뒤로 물러나 나를 발견하는 방법이었다. 146쪽


책이 너무 좋아서 괴로운 이야기. 바로 이거야.


나는 책의 고상한 세계, 우아하고 근사한 모습 뒤로 물러나 보기로 한다. 책 읽기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의 숨겨진 모습, 책 때문에 쩔쩔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책을 읽다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코 푼 휴지를 쌓아가며 눈물 질질 짜며 읽는 모습.....


이런 걸 쓰겠어, 휙휙 써 놓은 글씨들, 나중에 과연 알아볼 수가 있을까 싶은 메모지들이 널려 있는 책상에서 이렇게 첫 꼭지를 썼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으으 벌써 괴롭다. 그런데 글을 쓰니 좋다. 팔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