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날은 거의 없다. 읽고 있는 책들 몇 권은 기본이고, 노트북, 다이어리, 메모지, 연필 몇 자루, 필통, 핸드크림, 블루투스 스피커, 달력, 시계, 독서 노트, 마우스, 휴대폰 거치대, 티 코스터가 어지러이 놓여 있다.
가로 90, 세로 60 센티미터 너비의 책상 위는 아무리 정리를 해도 금방 뒤죽박죽 되기 일쑤다. 읽고 있는 책, 모임에서 다룰 책, 리뷰를 쓰려고 아직 책꽂이에 꽂지 못한 책, 새로 배달된 책, 조금씩 진도를 맞춰 읽는 책.... 그 책들은 위태하게 책탑이 되어 있거나, 읽다 그대로 엎어둔 채로 있거나, 침대 위로 던져진 채 기약 없이 기다리다가 자정 가까운 시간에 책상 위로 쌓이는 신세가 된다.
책을 읽다 말고 저자가 언급한 책을 검색해서 찾아볼 때가 많다.
우와, 이 책 재밌겠다.
목차를 살펴보고, 책 소개글을 읽다가 장바구니에 쏙.
어떤 책은 가슴이 쿵쾅거림과 동시에 빛의 속도로 주문을 한다. 요즘은 오전에 주문하면 저녁에 배송이 된다. 아침에 읽던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책을 밤에 펼쳐보면서 기분이 묘해질 때가 있다. 흥미로운 책을 빨리 만나서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책을 기다리는 설렘을 빼앗긴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아침에 읽던 책을 다 읽고 나서 펼치면 좋을 텐데 새 책에 마음이 뺏겨 슬그머니 읽던 책을 덮어놓을 때가 간혹 있다.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치기까지 또 다른 책이 새치기하지 않으면 다행일 터.
어릴 적 새 공책을 쓰고 싶어서 몇 장 남은 지면은 글씨도 큼직하게, 여백도 듬성듬성 남기고, 괜히 쓸데없는 그림도 그려 마지막 장을 채우고 얼른 새 공책을 펼치는 심정처럼 새 이야기, 새로운 장르의 책들에 욕심을 부리곤 한다.
분명히 그날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도 엉뚱하게 다른 책을 단숨에 완독 한 적도 있다. 아침에 훑어본 블로그 이웃의 리뷰가 너무 훌륭해서 당장이라도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휩싸여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 사람의 통찰력에 질투를 느낀 것인지, 그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였는지, 집 근처 도서관에 그 책이 마침 있어서였는지 도통 그 심리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글을 쓰다가 참고를 하려고 어떤 구절을 찾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기 시작할 때도 있다. 그제는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가 그랬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도 여러 번 그랬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모임 준비로 이미 읽었어야 할 책을 허겁지겁 읽기도 하고, 또 다른 책이 새치기를 해서 읽다 만 채로 책꽂이로 직행할 때도 많다.
책장을 정리하다 보면 완독하지 못한 책들이 수두룩하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이번에는 완독 의지를 불태우며 새로운 미션을 감행한다. 읽다만 책을 뽑아 한 곳에 쌓아놓고 다이어리에 목록을 적어 놓고 읽기 시작한다. 남은 분량이 적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다 읽고 나서 밑줄 쫙. 완독 완료!
다이어리에 읽은 책 목록을 적는 페이지를 펼쳐 의기양양하게 책 제목을 적는다. 그렇게 몇 권을 해치우는 동안 새치기하는 책이 생기면 이 미션은 또 잠시 휴지기에 들어간다. 책상 옆 선반에는 그런 책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욕심껏 쟁여둔 새 책들 사이에 꿋꿋하게 자신의 이름을 다이어리에 올리고 싶어서.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순간이 수시로 찾아온다. 책이 책을 불러오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상에 호기심이 일고, 책에서 등장하는 물건이 탐이 나고, 좋아하는 작가가 읽는 책을 다 따라 읽고 싶어지는. 그러다 보면 딴 길로 새기 일쑤다. 검색창을 켜고 이것저것 눌러보다 엉뚱한 물건을 사기도 하고, 읽기 힘든 어려운 책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소유욕에 불타 덥석 사 버리고.
정신없는 책상 위를 볼 때마다 온갖 핑계를 대고, 자기 합리화를 하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어 진다. 묵묵히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듯이.
너희들!! 새치기 좀 하지 말아 줄래?
식구들이 혀를 끌끌 차며 잔소리를 하고, 제 주인은 이렇게 애맨 소리를 해도 책들은 아무 말이 없다. 그게 참 고맙다. 글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수시로 새치기하는 책들을 참 좋아하는데. 너무 푸념만 늘어놨네. 얼마나 흥미진진한 책들이 많았어? 책의 세계에서는 새치기를 해도 되지. 아무렴.
얌전히 줄을 서서 시키는 대로만 살았다. ‘초중고 다음엔 대학을 들어가야지. 대학 마치면 당연히 취직해서 돈 벌고. 나이 차면 결혼해야 하고, 당연히 애를 낳아야지. 애들 뒷바라지만큼 중요한 게 어딨어. 애들만 잘 키우면 되는 거야......’ 그 줄에 서서 한 번도 딴 길로 새어보지 못한 게 아쉽다.
대학 말고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탐구해보지 못한 것, 결혼하기 전에 여행도 많이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 보지 못한 게 가끔 후회된다.
책을 읽다 매료되는 순간은 내가 해보지 못한 일, 내가 가보지 못한 나라,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이다. 이제라도 가보지 못한 길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심정으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니 책의 세계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새치기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니 제목은 푸념으로 시작했지만 마무리는 훈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