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소설가도 못 쓰겠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쓰랴

북 코디네이터의 투덜투덜 책사랑 이야기

by 이화정

책을 읽다 보면 무언가 감당 안 되는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쩔쩔맬 때가 있다.


어어어! 이게 뭐지? 이거 이거 뭔가 있잖아. 근데 이거 뭐라고 표현해야 돼?


언어철학자이자 번역가, 비평가로 이름난 발터 벤야민의 글을 머리 쥐어뜯으며 읽다가 기발한 비유와 시적인 문장들과 맞닥뜨리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기억.

그가 말한 '현상'에 대한 개념이 알쏭달쏭한 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어느 날 소설가가 쓴 '느끼는 것'과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가 느낌표 딱! 찍히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명확히 이해한 것도 아니면서 그저 차곡차곡 쌓아둔 문장들을 가지런히 펼쳐 놓고 좋아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아... 뭔지 알겠어..... 흠....... 근데 나는 설명할 수가 없군......


아름답다고 칭해질 만한 근거가 있는 모든 것이 지니는 역설은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나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 길출판사 115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다'

이 한 글자 차이가 가지는 의미는 깊고도 크다.

-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봄날의 책 80


일단은 열심히 필사를 해 둔다. 몽당연필을 쥐면 왜 더 간절한 마음이 드는 걸까. 바투 쥔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간다.


언젠가 나도 흡족한 문장 하나 쓸 수 있겠지.


음악을 들으며 좋은 책을 읽다 보면 유난히 가슴을 울리는 연주가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순간배경음악처럼 책 속 펼쳐지는 장면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선율.

이어폰 속으로 흘러들어 온몸을 휘감을 때의 느낌 역시 나는 표현할 재간이 없다. 그럴 때 이런 문장이 눈앞에 나타나면 전율이 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현실에 생겨나는 현상을, 나는 믿게 되었던 것이다.

-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봄날의 책 155



마리 사무엘슨
출처: https://youtu.be/sO7Y8jVVGTQ

미야모토 테루가 쓴 책 <환상의 빛> 은 영화도 찾아보고, 영화와 비교하며 다시 정독해서 읽을 만큼 좋아했던 책이다. 그가 쓴 에세이 <생의 실루엣>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연립주택에 얽힌 작가의 어린 시절을 알게 되었다.

두 책의 표지는 묘하게 닮았다. 고독한 인간의 실루엣. 뒷모습과 옆모습.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숨겨진 감정이 읽히는 사진과 그림.

책을 읽다가 소름이 돋는 순간이 계속 이어졌다.

아마도 나는 터널 연립주택에 맡겨진 고작 1년 사이에, 사람들에게는 타인이 짐작할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나 싶다.

.....

세상에는 70억 명의 인간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 있다는 뜻이다. 터널 연립주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왠지 숙연한 기분이 든다.

-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봄날의 책 175/178


요즘 빠져보는 드라마 <인간 실격>이 떠올랐다.

회를 거듭할수록 이 드라마가 좋다. 보면 볼수록 두 사람만이 주인공인 게 아니어서 좋다.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등장하는 그 인물이 드라마의 주역이 된다. 그 사람의 지나온 삶이 궁금해지고, 의아하고 밉살스러웠던 행동이 수긍이 가고, 어떤 마음인지 알고 같아 같이 울고 싶어 진다.
작가가 인물 하나하나에 품은 애정과 존중하는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지는 드라마는 처음이다. (딱 한 사람만 용서가 안 된다. 아내와 어린 배우에게 손찌검을 하는 남자,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경우는 용납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은 언제나 가슴이 아리다. 박인환 배우님이 나올 때마다 심장이 쿵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제일 많이 보고 싶은 장면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노화와 질병이 야기하는 삶의 변화, <가난의 문법>이라는 책에서 보았던 가난한 삶의 경로와 복지 정책의 한계, 인간 실존의 근원적 외로움에 대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힘들지만 말이다.
밉살스러운 모습의 인물(신신애 배우님)조차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말 뒤에 감춰진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을 그려내는 과정을 보면서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캐릭터를 만든 걸까 감탄했고, 고마웠다. 배우들의 대사를 책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드라마 대사집을 낸다면 두말없이 사보겠다.

타인의 아픔에 서서히 공명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있다. 함부로 넘겨짚지 않고, 섣불리 아는 척하지 않고, 제멋대로 판단하지 않으며 타인을 대하는 법. 김지혜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마음의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실격’에서 시작해 ‘인간’만이 남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다.

사는 동안 나 자신이 실격당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글이다.


책의 말을 빌리고, 작가의 표현에 의지하여 겨우 흉내 내듯 글을 써온 나는 여전히 이런 문장들 앞에서 주눅이 든다. 맞아, 맞아, 호들갑을 떨며 밑줄을 긋고, 그것도 모자라 요즘 유행하는 형광색 긴 색띠를 붙이다가 깨닫는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쓰지 못할 문장들이군.


좌절감과 질투심이 뒤섞여 가슴이 찌르르하다. 그러면서도 백 권의 책을 펴낸 작가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우연히 만난 한 청년이 신기루 너머로 사라지던 순간의 모습을 묘사하며 고백한 이 구절에 묘한 위안을 받는다.


이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청년을,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의 어디에도 두지 못했다.

싸구려 연립주택의 복도에 둘 수도 없다. 혼잡한 도시를 걷게 할 수도 없다. 술집 카운터에 걸터앉힐 수도 없다. 고시엔구장의 야외석에 앉힐 수도 없다.

그를 본 뒤로 15년 정도가 지났지만, 이글거리는 열기와 거센 바람 따위 개의치 않고, 이런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작은 모래 회오리들 사이를 계속 걸어가 사라진 그 청년에게 빙의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봄날의 책 62


봐,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결국은 못 쓰고 만 것도 있네.


평생 소설을 써 온 미야모토 테루는 '소설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직조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이야기라는 것 또한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나라는 인간을 크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못내 괴로워하는 나에게 고맙기 그지없는 말을 남긴다.


잘 쓰고 못 쓰고는 나중에 따라온다. 마음속에 있는 풍경과 자연과 인간이 하는 다양한 일을, 애정을 담아 소설로 쓰자.

-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봄날의 책 83


세 권의 책을 내는 과정에서 훌륭한 책들의 인용구에 기대어 글을 쓰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말이 사족 같아 마음이 불편할 때도 많았다.

이 글은 나의 현실을 점검하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썼다. 나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들에 속수무책이고,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표현할 길이 없다.

책을 읽다 얽히고설키는 말들과 작가들이 던져 준 사유의 단초들을 어떻게 꿰어 내 언어로 기록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기록한다. 빛나는 문장, 눈물겨운 장면, 소름 돋는 음악,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이 조우하던 순간이 분명 내 앞에 아름답게 펼쳐졌으니까. 무언가 내게 간절히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믿는다. 그러니 쓰는 건 다음이어도 좋다. 지금은 그냥 느끼는 것에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