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그 이전 조상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사실 제로에 가깝다. 이유는 간단하다.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아버지가 11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결과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그 윗대 분들과 당신의 아기 시절과 유아시절 이야기, 당신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등을 들을 기회가 사실상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고향을 찾아 아버지의 고종사촌 또는 고종육촌 형제들을 만난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한두 가지라도 더 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작업을 하려면 여러 가지 이유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지금 나와 아버지가 아는 것이라고는 족보에 기록된 짧은 내용과 몇 가지 들은 이야기 밖에 없다.
단편적이고 추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아버지를 낳아준 할아버지와 그의 형제들, 그 윗대인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조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적어본다. 고조할머니를 비롯해 그 이전의 조상들에 대해서는 여기에 적지 않는다. 이유는 구전되는 내용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그 시대의 유명한 사람 혹은 명사가 아니었다. 그분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의병 항거 등 누구라도 감당해 내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던 구한말과 일제식민시대라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실로 유추해 보았을 때, 그분들은 가족에게 충실했고, 이웃과 친하게 지내며, 농부로서, 장사꾼으로서 성실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고조할아버지는 어떤 일 때문에 서울(당시 한양)에서 살다가 전라도로 도망을 왔다. 그러나 이유는 나쁘지 않다. 고조부는 민란, 반란 같은 반체제적인 저항에 참여했고, 그 결과 당시 정부의 탄압 같은 것을 피해 전라도로 온 것이다. 고조부가 참여한 민란 혹은 반란이 어떤 것이고, 참여 정도가 어느 만큼이었는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우리 집안사람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님들을 비롯해 일가 친척들 중에 빛나는 성공을 거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와 관련해서 부정적인 말이 전해지는 것이 없고,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 고모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과 특별한 부딪침 없이 무난하게 살았다. 이런 결과는 증조부가 범죄 등 나쁜 일로 한양에서 전라도 임실 산골로 도망 오지는 않았다는 증거일 듯하다. 체제 저항에 참여한 사람들은 강도, 도둑 등의 범죄자와 다른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고자 했지만, 사회적인 환경 탓에 그것이 여의치 않아 국가를 상대로, 지배계급을 상대로 저항을 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 한만복은 1876년에 태어났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아마 한만복 증조할아버지의 아버지인 고조부는 아무리 못해도 1856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고,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는 1870년대와 1880년대였을 것이다. 역사책을 보면 이 시대에 다양한 형태의 민란, 반란, 저항 등이 발생했다. 권력을 가진 관료들과 양반들의 일상적인 부정부패, 매관매직, 농민수탈 등이 원인이었다. 전라도, 평안도 같은 지방 외에 한양과 그 주변에서도 수많은 반체제적인 소요, 봉기, 저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