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종성 3리이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종성3리라 부르지 않고, “가리점”이라 불렀다. 이곳은 1987년 1월 1일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로 편입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종성리 사람들이 행정적인 일을 볼 때, 산내면 면사무소보다는 강진면 면사무소가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가리점은 산 좋고, 물 좋은 산골 마을이다. 마을은 회문산 자락에 둘러 쌓여있다. 회문산은 높이가 837미터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회문산 자락 높은 곳,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개울이 되어 마을 앞으로 흘렀다. 이 물은 계곡을 따라 1km 정도를 흘러서 섬진강으로 합쳐진다. 마을에는 회문산 자락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30여 채의 초가집이 있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집은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나였고, 싸리나무로 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호지를 바른 초가집 문을 열면, 눈앞으로 높고 낮은 산과 구릉이 보였다. 봄이면 분홍빛 진달래와 하얀색 꽃이 피는 조팝나무가 산자락을 따라 피어나고, 여름이 되면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산에서 불어오고, 신갈나무, 떢갈나무, 굴참나무 등 각양각색의 참나무가 짙푸른 자태를 뽐내곤 했다. 가을이 되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은 빨갛고 붉은색으로 단풍이 들었고, 겨울에는 잎사귀가 사라진 나무 사이로 하얀눈이 수복히 쌓이곤 했다.
사람들은 주로 비탈진 산자락에 논과 밭을 일구고, 옥수수, 감자 같은 밭작물과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삼베농사였다. 가리점 사람들 중에 몇몇은 봄에 씨를 뿌리고 7월과 8월 더운 여름에 낫을 들고 삼베옷의 원료인 푸른 대마를 수확했다.
평평한 곳에 논과 밭을 가지고 있거나 삼베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중에 살림이 낳은 편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살림이 어려웠다. 그러나 평평한 곳에 논과 밭을 가진 사람도 살림이 상대적으로 괜찮았다는 것이지, 먹고 사는 걱정을 안 하고 살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평평한 곳에 논과 밭이 있든, 비탈진 곳에 논과 밭이 있든 성인이 된 남자와 여자라면, 하루 세끼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 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때론 아이들도 어른들의 일손을 도와야 했다. 어쨌든 아버지가 태어난 마을은 부유하지 않았다. 당시 마을에는 기와집이 한 채도 없었다.
마을 사람 중에는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마을은 송씨 집성촌의 성격이 있었고, 그 마을에 아버지 같은 한씨 성을 비롯해 서씨 등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지금은 공장 등 생산 시설이 많거나 교통이 발달해서 인구의 이동이 많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산다.
그러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잘 사는 곳은 논과 밭이 많은 평야 지대였다. 흔히 만석꾼 천석꾼이라는 부자는 김제나 부안처럼 평야지대에서 나타났다. 임실은 산이 많은 곳이었다. 바꿔 말해 임실은 부자가 나타날 만큼 논과 밭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태어난 마을은 산이 많은 임실에서도 산이 더 많은 곳이다. 한마디로 첩첩산중,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이 얼마나 산골이었는지는 마을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 2가지에서도 들어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마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준다. 40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만해도 마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듯하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골짜기로 화전민이 살았거나 호랑이, 늑대, 여우 등이 살았던 곳일 것 같다.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 형조참의를 지내다가 죽었던 김수라는 분의 부인 옥천 조씨가 작은아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피난을 왔고, 그 때부터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조선 말,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조카 김현채 토마스에 관한 것이다. 두 사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으로 숨어들었고, 생계수단으로 숯을 구워 팔았다고 한다. 그들이 살았던 곳과 무덤이 마을 뒤편 산길을 따라가면 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려준 산이 하나있는데, 그 산은 김난식 프라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가 살던 곳과 멀지 않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임진왜란, 병인박해 등 나라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피난을 오거나 숨어드는 곳일 만큼 산골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가곤 했다고 한다. 시장에 가려면 집에서 출발해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에 난 길을 따라 1km 정도 걸어 나가야 했다. 그 다음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섬진강변과 산비탈을 따라 붙었다 떨어졌다 놓여져 있는 길을 따라 또 한참을 걸어갔다.
아버지가 살던 마을의 이름은 강진면 면사무소에 백운마을로 소개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백운마을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가리점이라고 불리웠다. 어릴 때도 그렇고, 이번에 당신의 일생을 쓰기위해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가리점이라는 지명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이번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가리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임실군의 문화해설사를 하는 분이 가리점이란 지명의 의미를 소개한 기사가 있었다. 그분에 따르면 마을 지명에 “점”, “사기”라는 명칭이 들어가면, 옹기를 굽거나, 숯을 굽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리점 사람들은 오래전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그러나 아버지의 기억 속에 이런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옹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거나 관련된 가마터 등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가리점 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해설사 분이 틀린 말을 할리는 없을 테니, 아마도 어떤 시점까지 마을에서는 옹기를 만드는 일을 했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시점에 옹기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게 된 듯하다. 아버지는 “가리점 사람들이 옹기를 구웠다는 이야기와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가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추론을 했다.
”아마 옹기 가마터는 섬진강변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의 중간쯤 오른편에 있었을 거야. 그곳에 좋은 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숯을 구워 팔았다면, 이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금도 그렇고, 내가 살았던 어린 시절에도 그렇고, 마을 주변은 온통 산이고, 산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지 않냐. 그러니 내가 태어나기 전, 더 옛날에는 마을 주변의 숲이 더 빽빽하면 빽빽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태어난 곳, 가리점은 산골 중에 산골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