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이름은 한판금이고, 할머니 이름은 최복순이다. 할머니의 본관은 경주 최 씨이다. 할아버지는 1896년 12월 15일에 태어나서, 1951년 7월 16일에 5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1905년 10월 10일에 태어나서 1984년 추석 전날 8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할어머니는 2남 1녀를 낳으셨다. 첫째는 딸이 나의 고모, 한옥순이다. 고모는 1937년 태어나 이 책을 쓰고 있던 2019년 12월 83살에 죽음을 맞이했다. 둘째는 나의 아버지 한일수이고, 셋째는 작은아버지 한이수이다. 할아버지의 키는 중간 이상이었고, 할머니의 키는 작았다. 아버지는 키가 작은데, 그것은 아마도 할머니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할머니는 키는 작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담배를 피우셨을 정도였고 잔병치레 없이 살았다. 아버지도 병원에 가본 적도 몇 번 안 된다. 고모와 작은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건강한 신체는 아마 할머니로부터 받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한때 증조할아버지처럼 농사를 짓고 봇짐장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봇짐장사를 하던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붓짐장사의 ‘봇’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었고, 어머니는 작은아버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봇짐장사를 할 때, 할머니와 함께 다니시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부지런함’을 전해준 듯하다. 아버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항상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갔을 때도,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농사를 대신 지어주거나 품을 팔아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밥을 양껏 먹지 못하고, 감자와 고구마 등을 먹었지만 아버지는 끼니를 굶어본 적이 없었다.
“다정함”과 “전통적인 사고방식” 아버지가 추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나무를 하러갔다. 할아버지는 어린 아버지에게 맞춤형으로 지게를 만들어 주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려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가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싫었지만, 작은 지게를 메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린 나이라 힘도 들고 친구들과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낫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자르고, 그것을 다시 손바닥 반만큼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가지를 비틀어 미끌미끌한 나무와 껍질을 분리했다. 분리해낸 껍질은 빨대 모양이 되었다.
“삘릴리 삘릴리”
할아버지는 버들피리를 입으로 한번 불더니,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아버지는 버들피리를 불며,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할아버지를 추억했다.
“장날, 장에 갈 때, 다른 집의 잔치가 있을 때, 아버지가 나만 데리고 다녔지.”
한옥순 고모에 따르면 할아버지의 성격이 별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모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어디선가 꿀을 가져왔는데, 그 꿀을 아버지에게만 먹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남자라는 이유로, 장남이란 이유로, 할아버지에게 일정한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때야 다 그런 시절이었지. 여자보다 남자 챙기고, 차남보다 장남에게 더 잘해주고.”
아들을 선호하고, 같은 아들이라도 장남을 선호하는 옛날 생각이 넘쳐나던 때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뭔가, 엄청나게 큰 혜택을 받았거나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아버지는 장남이란 이유로 형제들을 위해 자의반 타의반 여러 가지 희생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