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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바퀴 Nov 15. 2017

차를 찾아 떠난 그곳, 하동

- 우리나라 차 기행 1

하동에서 만난 올해 첫 찻잎 - 재래종

 1962년 이후 3대에 걸쳐 덖어온 차농, 바로 화개 수제차 1세대 '조태연가 죽로차'이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차문화여행 기획 차, 화개를 돌면서 들렀던 곳 중 하나다. 내 기준으로 화개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찻집이 4군데 있는데, 화개동 첫 찻집 '녹향', 법정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우찻집', 수제 고급차만 고집하는 '무향', 그리고 이곳 '죽로찻집'이다. 

 뭐, 화개의 이름난 찻집이 이곳 뿐이랴. 차를 깐깐하게 만드시는 보성스님의 상선암차 상선다원, 정결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자닮황차 고연산방, 그리고 끽다거, 요산당, 화개다원, 풍경소리 산녹차, 삼신다원 등... 수십여 곳의 이름난 찻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특히 4월 말 쯤 구례를 거쳐 하동으로 들어서면, 꽃이 흐드러진 벚나무를 양옆에 둔 이차선 길이 강물을 따라 흐른다. 섬진강이다. 그 아늑한 아랫목 같은 강, 늘씬한 처녀 허리 같은 강,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참게탕 같은 강, 서희와 길상의 눈물 같은 강, 그래, 그 눈물 같은 강, 그렁그렁 맺힌 채 떨구지 못하고 기어이 세파에 밀려 말라붙어버린, 지역민들의 눈물 같은, 그 강. 
 하동에 들어서면 바로 화개면이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수류화개'의 본고장. 수십 개의 차산이 진주처럼 박혀 있고 그곳에서 차를 덖는 이들은 들르는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차에 저당 잡힌 삶을 우려낸다. 그곳도 지나면 악양면이다. 강 언저리에 드문드문 모래톱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한자로 평사리이다. 평사리의 끝까지 가다가 왼쪽으로 돌아들면 최참판댁과 서민들의 마을을 소설 비춰주듯 꾸며놓았다. 부부 소나무도 늘 푸른 모습으로 정겹게 이방인을 맞는다. 

 더 깊이 들어가니, 하동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순박하니 평생을 살아온 농사꾼, 산꾼들이 작은 마을을 일구고 그 스스로 산의 일부가 되어 있다. 나는 노전마을을 찾아 그 마을에서 산을 오르면 나타나는 몇 채의 가옥, 그리고 그조차 넘어서서 가파른 '깔크막'을 극복해야 나타나는 대밭으로 허위허위 기어 올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대밭의 뒤편으로 다시 올라서 돌아드니, 아담한 한옥과 장작가마를 지어놓은 한 사기장의 보금자리가 나타났다. 

화개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찻집 '무향' - 이곳 주인은 개성이 강한 화개요 차도구를 즐겨 사용한다.

 이곳이 도예가 안상흡 작가가 사는 화개요다. 지난 번 찾으려 했을 때는 프랑스에 갔던 탓에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녁 먹으러 나갔는지 조용하다. 결례를 무릅쓰고 작가님을 목놓아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다. 허락을 얻지 못하고 불쑥 찾은 원죄가 있는지라, 몸도 마음도 머리 꼭대기까지 들숨으로 차오른 몸과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금 터덜터덜 산을 내려갔다. 인연이 닿을 때가 있겠지. 삼고초려하려면 삼 세판이려니...
 산 아래 정박해 둔 차를 다시 굴려가며 조태연가 죽로찻집으로 향했다. 화개장터를 관통하여 칠불사 쪽으로 죽 들어가니, 관광객 손때 타지 않은 알짜배기 찻집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조태연가는 그 중에서도 끄트머리 산중턱에 있었다. 지리산 자락이니 오죽하랴. 화개요든 죽로찻집이든, 기어이 올 사람만 받는구나 싶었다. 
 4월 말에 찾아간 죽로찻집은 저녁까지도 녹차를 만드는 일꾼들로 인해 분주했다. 유기농 차나무에서 딴 찻잎을 엄격하게 수매하여 조태연가만의 제다 방식으로 죽로차를 만들어낸다. 지금은 3대인 조윤석 차인이 대표를 맡아 탄탄하게 대를 잇고 있다. 
 시들린 잎을 씹어보니, 쌉쌀하면서도 싱그러운 맛이 정신을 깨운다. 아, 목마르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에게 차 한 잔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흔쾌히 햇차를 꺼내 우려준다. 죽로차 우전, 이번 우전은 지난 해에 비해 특히 맛이 좋게 나온 것 같다며 싱글벙글이다. 다관에 차를 넣고 95도로 유지되는 보온병에서 물을 받아 숙우에 잠시 식히는가 싶더니 바로 다관에 붓는다. 그리고 1분 정도 있다가 첫우림 차를 내었다. 
 첫 잔을 마셨다. 바싹 말라 있던 목울대가 다시 촉촉해지더니 살이 오른다. 가장 화려한 맛을 자랑하는 첫 잔이었음에도 무척이나 목 말라 있던 차라,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마중물로 써버렸다. 그래서 숙우에 담긴 찻물을 다시 따라 맛을 보았다. 햇차만이 가지는 산뜻함과 달큰함, 그리고 우전의 여리면서도 싱그러운 존재감이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혓뿌리를 자극하는 아릿한 뒷맛. 아, 맛있다. 마시고 또 마시고 다시 마시고... 이렇게 맛있는데, 다식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혼자서 찬찬히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강렬하여, 가장 여린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우전 한 봉 사들고 서둘러 집을 향해 달렸다. 

녹차 전용으로 쓰는 묵전요 분청차호에 담아, 올해 첫 녹차 맛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다. 

 다락당에 중국 녹차인 안길백차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일주일 만에 한국 녹차인 죽로차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덥혀 둔 분청차호 안에서 녹차의 싱그러운 건향이 진저리를 치며 물대로 새어나온다. 햇차라고 마냥 화려하진 않다. 차분하고 농밀한 이 느낌, 이것이 바로 마지막 가향처리를 할 때 벌어지는 죽로차만의 정체성일 것이다. 뜨겁게 우려도 자극적이지 않고, 다섯 번째까지도 맛의 변화가 거의 없다. 잎은 일아일엽 중심, 오대나 뜬잎을 철저히 가려냈다. 부서진 찻잎가루도 거의 없고, 이중 포장으로 향을 지켰다.
 


봄아, 더디 가거라. 
차 마시는 이에게 봄은,
자연이 차려주는 찻자리려니.
내가 차에 물려 자리를 뜰 때까지
서둘러 찻상을 거두지 말아다오. 

차인에게 봄날은,
이제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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