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 봄볕이 좋아, 햇차 들이고
엊그제는 비바람을 앞세우고 잎샘추위가 들이닥쳤다. 완연한 봄이라고 텃밭에 씨앗을 심다가 그만 흠뻑 비를 맞고 말았다. 심다 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비를 맞으며 호박, 결명자, 돼지감자를 심고 돌아왔다.
이렇게 을씨년스럽게 하루를 넘기긴 싫었다. 그래서 옥상에 난 조선부추와 쪽파를 잘라다가 파전, 부추전을 부쳐먹었다. 겨울을 겪고 단단하게 자라난 놈들이라 향이 진하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도전하는 20대에게 맥주를 사주고, 2차는 오랜만에 처제들과 깔루아에 우유를 타서 기분을 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늦은 밤에 누워서 멍하니 있자니, 차 갈증이 인다. 작년도 올해도 봄은 바빴다. 다만 작년엔 그 안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삶의 피로를 넘긴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그렇지가 않다. 다락당에 찻잔을 놓고 앉아 있을 때에도 자꾸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잃어버린 여유를 찾고 싶다.
향탄을 묻고, 향목을 무심하게 얹어둔 후, 잊었다. 향은 잊어야 발견할 수 있다. 그저 공간에 녹아들도록 방치해본다. 그렇게 상념에 젖다 퍼뜩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 결에 콧등을 지나던 향이 짐짓 서슬에 놀라 잠시 머무는 것이다. 내 속에 잠시 울며 돌다 가는 것이다.
나는 손에 집히는 대로 차를 한 줌 꺼내고, 가장 가까이 놓인 차도구에 담았다. 우리는 시간도, 물의 온도 역시 규정하지 않았다. '水然',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 차를 마시고 싶었다. 또한 깔대기가 있음에도 차를 그냥 우겨넣는다. 남원 매월당 홍차는 뜨거운 호에 들어가기 싫어, 입구에 다리를 걸쳐 두고 시위 중이다. 그러나 이내 덥혀둔 차호의 입김에 한풀 꺾인 나머지, 결국은 둥근 호 깊숙한 곳으로 이끌리고 만다. 동화되고야 만다.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하며, 사진도 찍어가며, 차를 마신 지가 얼마만인가. 불그스름한 찻물이 조명을 받아 한층 붉게 빛난다.
그렇게 여유를 부려보았자 열 시다. 아이도 재워야 하고, 다음 날 출근 준비도 해야 한다. 이렇게 초저녁만 겪다 보면, 삼경이 무척 그리워지겠지. 그리움이 극에 달해 내 속을 벅벅 긁어내다 보면, 생채기는 날 지언정 방학이 올 것이다. 다소 늦게 잠들고, 다소 늦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기다리는 시절이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