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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바퀴 Nov 15. 2017

봄에 만난 숙차

- 3.28 봄볕이 좋아, 햇차 들이고

 삼월이 간다. 꿈 꾸듯 바빴던 한 달이었다. 밤새 꿈 속에서 난 누군가에게 쫓기고, 서둘러 재촉했던 길은 끝이 없었다. 물론 쫓겼으나 절망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달리는 과정에서 쾌감마저 느꼈던 이른 봄의 탈주. 피날레를 정해두지 않은 채 원형 트랙을 마냥 돌다, 간신히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온 느낌이다.

보이차 숙차 '용봉정양' - 흥해차창 2009

 헉헉대는 숨을 고르며 여유를 찾을 즈음, 맛있는 숙차를 만났다. 중국의 흥해차창에서 2004년 모료를 가지고 2009년에 만든 '용봉정양'이다. 흥해차창이야, 맹해에서 근무했던 분이 창립하기도 했고 숙차로 차왕상을 받은 적도 있어서 신뢰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깔끔한 숙차를 많이 접해보질 못해서 그간 즐겨 마시진 않았는데, 이번에 두고 두고 즐길 숙차를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다. 

 포장지를 보니 '오년진다 호현미엄'이라 적혀 있다. 아마도 오년 묵은 찻잎을 썼고, 터럭이 보이며 맛이 진하다는 뜻일 것이다. 차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아가 많이 섞였고, 아주 여리고 작은 잎으로 만들어서 순함과 동시에 뒷단맛을 기대할 만하겠다. 만듦새도 깔끔하고 잡냄새도 없다. 숙차가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편이다. 아, 어서 마시고 싶다. 지난 한 달 내내 나는 충분히 목 말랐으니, 무엇이든 단꿀처럼 목젖 언저리에서부터 환대받을 것이다. 진주요에서 만든 백자다관, 백자숙우, 백자잔을 놓고 병차를 부쉈다. 

 차칼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긴압이 느슨하다. 손으로 옆을 살짝 잡으니, 쉽게 부스러진다. 워낙 어린 잎으로 소병차를 만들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부수어서 다하에 담아 놓으니, 처음부터 산차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매우 작은 잎들, 숙차치고 참 고급스럽게 만든 차를 마시게 되는구나. 

 숙차를 만드는 기술인 '인공쾌속발효' 초기부터 1990년대 말까지는 숙차에 고급 찻잎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탓에 '숙차' 하면 저렴한 찻잎으로 만들어 고급스러운 맛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2000년을 넘어가면서 이른바 '궁정'급의 고급 찻잎으로 숙차를 만드는 일이 많다. 심지어 야생 찻잎으로 만든 숙차도 볼 수 있다. 숙차 제조 기술이 공개된 1975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숙차는 보이차의 또다른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숙성미를 가득 담은 숙차를 몇 잔 마시면, 몸이 금새 뜨끈해지곤 한다.

 차호에 담긴 차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이내 버린다. 이렇게 두어 번 찻물을 버린 후, 세 번째 우린 찻물부터 마시기로 했다. 얇고 야트막하게 퍼진 진주요의 백자잔에 담았다. 호로록, 한 잔이 한 모금이다. 찻물은 뜨끈하게 나의 목을 적시고, 찬찬히 몸으로 스며들었다.
 예전에 클래식 바에서 알콜도수 70도가 넘는 무지갯빛 '천지창조' 칵테일을 마셨을 때가 생각난다. 바텐더가 쪼뼛한 잔에 담아놓고 불을 붙인 다음, 빨대로 한 번에 쭉 빨아먹으라기에 그대로 했다. 그랬더니 화끈한 술 기운이 들어가면서 식도가 난 길을 그대로 느끼게 하더라. 그때 독한 술이 내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면, 지금 이 숙차는 말라붙은 고목의 물관을 되살리는 듯하다. 이른 봄을 맞아, 넘치는 싹의 해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 떠내려간 내 정신을 건져올린다.
 

 이처럼 순하고 깔끔하고 달콤한 숙차를 이렇게 예쁜 잔에 마시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 내일 다시 출근해야 하는 평일 저녁임에도 다락당을 쉬이 등지고 싶지 않다. 


 직장에서는 한 달 간 열 두 개의 한 해 계획서를 작성하고, 네 개의 프로젝트 동아리를 발족시켰다. 수 년 전 아름다운 이별을 이루지 못해 몸에 동티가 났거늘, 이제 살 만하니 또 욕심히 피어오르나보다. 삼십 대에 가지치기를 배우고, 선택과 집중에 익숙해졌다고 확신했는데... 역시 역사는 진보가 아닌, 반복인가보다. 차 한 잔에 과욕을 다독이는 법부터 배워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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