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약하고 좁고 무관심한 내 세계에 관하여
“이건 뭐야?”
쉼 없이 묻는 일은 이제 갓 두 돌이 지난 아이의 주요 임무다.
내 아이는 놀이터보단 공원을,
넓은 공원을 누비는 것보단 땅에 얼굴이 닿을 만큼 낮게 앉아
뿌리내린 모든 것들을 살피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 이건 뭐야?” 아이의 손 끝에 이름 모를 풀이 나부낀다.
네가 태어나기 전, 여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내겐 그저 여름엔 푸르르거나 겨울엔 앙상한 하나의 덩어리였다.
나는 그 덩어리들이 각기 다른 개체라는 것도
이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럴듯한 대답을 찾기 위해 시간을 벌어보지만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아
“으음…글쎄..풀 아니야? “라고 어설프게 답한다.
”아아! 풀! “ 그러더니 아이는 충분한 대답이라는 듯 이름 모를 초록 덩어리를 쓰다듬으며 ”풀아, 반가워 “ 한다.
”그럼 이건 뭐야?” 다시 아이는 손을 뻗어 노르스름한 색의 무언가를 가리켰다.
“….” 머릿속이 복잡하다. 모른다’고 말해버리면 아이의 질문은 여기서 멈춰버리는 걸까?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이것도 풀…”하니
아이가 빤히 내 눈을 바라보곤 대번 답하지 않았다.
큰 눈이 ‘엄마, 이것도 풀이고 저것도 풀이면 이 세상에 풀이 아닌 게 있긴 있어?’라고 묻는다.
아이는 이내 그곳에 뿌리내린 모든 것들을 ’ 풀‘이라 불렀다.
존재하는 모든 다른 것들을 켜켜이 살피고 바라볼 줄 아는 아이의 능력을 내가 빼앗는 것만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가 말을 트기 시작하고
질문이 늘어날수록 내 세계가 이렇게도 좁고
빈약했음을 깨닫는 횟수도 늘어난다.
이런 고민은 날로 커져 내가 혼자 지고 가기 버거운 무게가 됐고, 그 무게를 나눠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A는 말했다.
”그래서 사교육을 하는 거야 “ A는 단호했다. ”두 돌이 지나면 인지와 지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데. 지금이 골든 타임이야, 홈스터디는 한계가 있어. 주변 엄마들은 다 몬테소리니, 베이비 영어니 이미 시작했어. 수학도 물론이지. 요즘은 놀이식 교육으로 두 돌부터 다 배워”
그날부터 한 달여간은 집 주변에 있는 몬테소리니, 영어니, 사고력 수학이니 내 아이의 세계를 넓혀줄 수 있는 전문가를 찾느라 분주하게 보냈다. 나는 정말이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원 후에는 어김없이 아이의 손을 잡고 추천받은 학원들을 찾아 체험 수업과 상담을 반복했고, 아이가 분리 수업을 거부하며 우는 일 역시 반복됐다.
’다른 아이들은 분리 수업도 곧잘 한다던데, 아이가 이렇게 적응하지 못하는 건 그동안 교육에 무관심했던 내 탓이야‘
끝끝내 이 여정은 선생님들조차 만족스러운 수업을 해본 적 없는 채로
아이는 버거운 수업에 진이 빠진 채로
나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아이는 저절로 자란다 믿었던 내 탓이오’하며 자책하는 채로 멈춰버렸다.
나는 지친 마음과 아이의 손을 부여잡고
오랜만에 학원이 아닌 공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었고
아이가 알던 푸르름은 붉거나 노란빛이 됐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아이의 얼굴에는 밝은 기색이 돌았다.
아이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만지기도
냄새를 맡기도, 몰래 맛을 보려는 듯 많은 것들을 입가에 가져가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일상이 그저 고맙게 느껴지던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를 들은 것이다.
“엄마, 이게 뭐야? “
천진하고 익숙한 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내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아득해졌다.
”아….. “
아이는 놀이터보다 공원을,
잔디를 밟기보단 땅에 내린
목단을, 수수꽃다리를 돼지풀을 자귀풀을 제 이름대로 불러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달여를 아이 손 끝에 나부끼는 풀들의 이름대신 아득한 곳을 헤매고 다녔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내 세계는 좁고 빈약하고 무관심하구나.
24. 10. 17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