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협회라는 울타리
은진은 새벽까지 펜을 쥐고 있었다.
일러스트 한 장을 완성할 때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 삽화를 그려내고 싶었지만, 요즘 그녀의 선은 자꾸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의 정체는, 작업이 아니라 청구서였다.
며칠 전, 미술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작가님, 올해 연회비 아직 미납이십니다. 납부하셔야 전시 기회가 유지됩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은진의 그림보다도 냉정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연필을 내려놓고 통장을 열어 보았다.
잔액은 3만 8천 원. 협회비는 50만 원.
“내 그림값은 한 장에 5만 원인데… 협회비 하나로 내 1년 그림이 다 사라지는구나.”
울타리 안과 밖의 이야기...
협회는 늘 말했다.
“우리가 있어야 작가님이 전시할 수 있고, 해외 공모전에 나가실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 안에 있어야 이름이 남습니다.”
그러나 은진은 느꼈다.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그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비와 인간관계였다.
울타리 밖에 있으면, 아무도 그녀를 작가로 불러주지 않았다.
“협회 등록 안 하셨어요? 그럼 작가로 인정이 어렵습니다.”
그 말은 곧, 그림은 있는데 작가는 없다는 선언 같았다.
그날 밤, 은진은 큰 캔버스를 앞에 두고도 선을 긋지 못했다.
“연회비를 내지 못하면 이 그림은 빛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선은 무슨 의미가 있지?”
그녀는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창밖에는 이웃집 아이가 놀다 떨어뜨린 연필이 굴러와 있었다.
은진은 그 연필을 주워서, 조용히 스케치북에 선 하나를 그었다.
그 선은 협회에 속하지 않았고, 심사위원도 몰랐으며, 도록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선은 지금까지 그린 것 중 가장 솔직했다.
며칠 뒤, 이웃집 아이가 놀러 와서 은진의 스케치북을 보았다.
“언니, 이거 내 꿈같아. 파란 성에 내가 들어가는 거 같아!”
아이의 눈빛은 순수했고, 환했다.
그 순간 은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협회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울타리를 지어주기 위해서라는 걸.
협회비가 없어 알바도 하고 카드빛도 내기도 하지만, 전시를 하기 위해선 선택을 해야 했다.
은진은 협회비 고지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 위에 크게 X 표시를 그었다.
“나는 오늘, 협회의 울타리 밖에 서겠다.”
그것은 불안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자유였다.
이제 그녀의 그림은 기록되지 않을 수도, 평가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이의 이름 아래에서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동화책처럼 작은 그림들을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건 네 이야기야. 여기 이 캐릭터가 너야.”
아이들은 기뻐하며 그림을 품에 안았다.
협회라는 울타리 밖에서, 은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 안에 들어갈 때 진짜 작가가 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노트에 조용히 적었다.
협회비로는 울타리를 살 수 있지만,
울타리 밖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선을 그었다.
이번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끝 (제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