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빚더미
한때 민수는 ‘빛의 화가’라 불렸다.
도시의 밤을 찍어내듯, 캔버스 위에 흘러내린 빛줄기는 늘 누군가의 마음을 밝혀주곤 했다.
그의 작업실은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가득했고, 그는 빛을 쫓는 사냥꾼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쌓인 건 빛이 아니라 빚이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고지서가 흩어져 있었다.
대관료, 도록 제작비, 광고비, 인쇄비, 대여비…
합치면 이미 천만 원을 훌쩍 넘었다.
그는 손에 머리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빛을 그리려다, 빚에 갇혔구나.”
지갑을 열어보니 남은 건 몇 장의 동전뿐.
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지만, 그 빛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잔인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민수는 결국 낮에는 건설현장에서, 밤에는 대리운전을 뛰며 돈을 모았다.
무거운 자재를 나르다 허리가 휘었고, 차 안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운전대를 붙잡았다.
그러나 번 돈은 고지서 한 장을 덮기에도 부족했다.
그는 작업실로 돌아오면 붓을 잡을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손에 남은 건 페인트가 아니라, 시멘트 가루와 핸들 잡던 땀자국뿐이었다.
전시가 열렸을 때, 벽에 걸린 그의 그림은 빛으로 가득했다.
도시의 밤을 찢고 나오는 가로등, 창문 속 희미한 불빛, 새벽을 향해 번지는 빛줄기들.
그러나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은 속삭였다.
“빛이 참 따뜻하네요.”
“이런 밝은 그림을 그리시니, 작가님도 행복하시겠어요.”
민수는 속으로 울었다.
그 따뜻한 빛 하나하나가, 자신이 진 빚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전시 마지막 날, 한 노파가 그림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녀는 그림 속 빛줄기를 손끝으로 따라 그리듯 허공을 쓰다듬더니, 민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작가 양반, 덕분에 오늘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네.
내 인생에도 아직 불빛이 있구나.”
그 말에 민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빛을 그리면서도 스스로는 빚에 짓눌려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빛이 아직 살아 있었다.
전시는 빚만 남겼다.
갤러리는 이미 다른 전시 준비로 분주했고, 그의 이름은 곧 지워졌다.
그러나 민수의 노트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빚더미 속에서도, 빛을 남겼다.
누군가에게 닿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작업실 창문으로 다시 햇살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조롱이 아니라, 약속처럼 느껴졌다.
민수는 다시 붓을 들었다.
“빚이 나를 삼켜도, 빛은 지워지지 않는다.”
— 끝 (제1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