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큐브의 틈

by FortelinaAurea Lee레아


제25편. 화이트 큐브의 틈



차가운 전시장의 ‘화이트 큐브’ 안.

빛은 완벽하지만, 온기가 사라진 공간.

그 안에서 한 작가가 예술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다시 묻다.


화이트 큐브의 틈


전시장은 새하얗다.

벽도, 바닥도, 심지어 공기마저 흰색으로 도배된 듯했다.

“화이트 큐브.”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빛이 가장 잘 닿는 공간, 작품이 가장 ‘객관적’으로 보이는 장소.


하지만 레아에게 그 하얀 공간은

어딘가 숨 막히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레아는 벽 앞에 서서 자신이 그린 작품을 바라보았다.

붉은 선과 검은 점들이 뒤엉킨 그림.

그녀가 붓질을 멈추지 못했던 밤들의 흔적이었다.


그런데 전시장 안에서는

그 붉음이 너무나 얌전하게,

마치 피가 아니라 디자인처럼 보였다.


큐레이터가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이 벽면엔 강한 색을 하나 더 배치해야 시각적으로 안정돼요.”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불안정해야 해요.

불안정해야 인간처럼 보이니까.”


큐레이터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요즘 관람객들은 그걸 불편해해요.”


그 말에 레아의 입술이 굳었다.

불편한 예술.

그것이야말로 진짜 예술인데,

이곳에서는 ‘불편’이 곧 ‘실패’로 해석되었다.



전시가 열리자, 사람들은 흰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누군가는 와인잔을 들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다.

작품보다 셀카에 더 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이 그림 얼마예요?”

“판매 완료됐나요?”

“요즘 이런 스타일이 잘 나가요.”


레아는 그 말들이

그림 위로 덮이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내 그림엔 가격표가 아니라, 상처가 붙어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좋은 작품이에요. 색이 고급스럽네요.”

그의 손에는 명함이 들려 있었다.

‘갤러리스트, 대표 ○○○.’

레아는 그 손을 받지 않았다.

그 순간,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거래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갈 무렵,

레아는 홀로 전시장 구석에 앉아 있었다.

벽과 벽 사이,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좁은 틈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비로소 진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틈에서 바라본 벽은 완벽하지 않았다.

조명 아래,

페인트가 미세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그 흠집 속으로 그림자가 들어가 있었다.


레아는 속삭였다.

“그래, 완벽한 흰색 따윈 없어.

진짜 예술은 늘 이 틈 사이에서 태어나지.”


그녀는 조용히 가방에서 작은 연필을 꺼냈다.

그 갈라진 틈에,

눈에 거의 보이지 않게 작은 선 하나를 그었다.

누가 봐도 그냥 흠집처럼 보이는 선.


하지만 레아는 알았다.

그건 자신의 ‘서명’이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예술이 여전히 존재함을 증명하는 숨은 서명.



큐레이터가 다가왔다.

“선생님, 이제 철수 시간이에요. 마지막 확인 부탁드려요.”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품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조명은 그대로 두세요.”


큐레이터가 물었다.

“밤새 불을 켜두면 전기세가…”

“괜찮아요.

이 벽엔 아직 말하지 못한 색이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검은 장우산을 짚은 채 문을 나섰다.


그날 밤,

화이트 큐브는 아무도 없는 채로 조용히 빛났다.

벽 사이의 그 틈,

레아가 남긴 선이 조명의 열에 서서히 녹아가며

마치 살아 있는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누군가 있었다면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 벽이,

아직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며칠 후, 전시가 끝나고 작품들이 철거되었다.

하지만 벽 틈의 그 선은 남아 있었다.

누구도 그걸 지우지 않았다.


그건 흠집이 아니라, 기억의 선이었다.

화이트 큐브가 아무리 새로 칠해져도,

그 벽 아래, 그 틈 속에는 여전히

한 예술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레아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다음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엔 제목을 정해두었다.


“화이트 큐브의 틈 –

완벽한 공간 속에서 사라진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그게 나였지.”


— 끝 (화이트 큐브의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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