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by FortelinaAurea Lee레아

제24편. 라벨



M. Ravel, Boléro, M.81


밤마다 같은 곡을 틀어놓는다.

라벨의 Boléro —

끝없이 반복되는 리듬이 서서히 커지고,

그 위로 관악기의 선율이 쓸쓸히 올라오는 곡.


나는 그 리듬을 들을 때마다

붓 대신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 안에서 무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늦은 밤, 작업실 벽에는 미완의 그림 세 점이 걸려 있다.

하나는 검은 장우산,

하나는 녹아내린 크레파스,

그리고 하나는 아직 하얀 캔버스.


나는 그 하얀 면을 바라보다가,

라벨의 선율이 천천히 올라올 때쯤

붓을 든다.


한때 색으로 폭발하던 손끝은

이제 주저하고, 떨리고, 미세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의 나는 완벽보다 지속을 그린다.


“그림은 숨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한 번 내쉬면 다시 들이마시듯,

그려지고, 지워지고, 또 그려진다.


라벨의 음악이 중반에 이르자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흔들린다.

노란빛이 오래된 필름처럼 깜박인다.


그 불빛 속에서 내 젊은 날의 얼굴이 비친다.

붓을 들고 밤새 벽화를 그리던 시절,

한 손엔 담배, 다른 손엔 희망.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 그림이 박물관에 걸릴 거야.”

그때 나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박물관보다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 순간의 나 자신이었다는 걸.


음악은 절정에 다다른다.

작은 북소리가 점점 커지고,

관악기가 밀려오듯 물결친다.


나는 그 소리와 함께 붓을 휘두른다.

손끝에서 색이 폭발하고,

붉은 물감이 캔버스를 덮는다.


그 붉음 속엔 피가 있고, 생명이 있다.

한순간, 숨이 막히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가슴이 쿵쾅거린다.


마치 음악이 내 안에서 직접 연주되는 듯했다.

“예술이란 결국,

자기 심장을 악기로 만드는 일이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음악이 끝나고,

방 안에는 긴 여운이 남았다.


나는 천천히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완성된 작품 안에는

언제나 슬픔이 들어 있었고,

간절한 희망의 혼이 깃들어 있었다.


응어리진 한이 굳어 상처가 아물고,

잊히기 위해 그려온 세월.


크기가 작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하는

끝없는 질문 속에서

나는 마음과 몸을 또 하나의 도구로 썼다.


한 작품을 끝내면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듯 숨이 가빴다.

그건 오래된 고백이었고, 고통의 흔적이었으며,

젊은 날의 미련이 아직 남아 있는 증거였다.


비록 관람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한 장의 캔버스일지라도,

내면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안에 혼신의 힘을 넣어 만든다.


몇 초 만에 한 작품을 휘리릭 그릴 때도 있었고,

몇 해가 걸려도 끝나지 않은 그림도 있었다.


제각각의 그림마다 다른 음악이 숨을 들이켰다.

흘러나오는 음률 속에 아픔을 쏟아내고,

눈물을 흘리듯 물감을 뿌리기도 했다.


늘 마음속엔 울음이 있었고,

그 울음이 색이 되어 캔버스 위에 흩뿌려졌다.


그 위엔,

검은 장우산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빗방울처럼 흩어진 작은 음표들.


그건 음악이 아니라

내 인생의 박자였다.

한 박, 한 박,

살아내듯 그린 흔적.


새벽이 밝았다.

라벨의 음반이 멈추고,

바깥에선 새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물통 속 붓을 씻으며 말했다.

“오늘도 또 한 점을 그렸다.”


이젠 누가 봐주지 않아도 괜찮다.

세상에 걸리지 않아도 괜찮다.


이 그림은 내 하루를 증명하는

시간의 기록이니까.


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햇살이 물 위에 부서지며 반짝였다.


검은 장우산은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

그 위로 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라벨의 Boléro를 틀었다.


“인생은 반복이야.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지.”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다시 붓을 들었다.


오늘의 색을 찾기 위해.


— 끝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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