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편. 벽에 걸리지 못한 날
모든 예술가의 삶과 내면,
“그림은 걸리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그려진다”
.
.
.
벽에 걸리지 못한 날
.
.
.
비가 내렸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는 빗방울.
하늘이 그림을 그리듯, 회색의 선을 도시 위에 그었다.
성주는 오래된 우산을 들고 골목을 걸었다.
그 우산은 몇 해 전, 그가 전시회 첫날에 샀던 검은 장우산이었다.
그날 이후, 수많은 전시가 있었지만 —
그림보다 오래 남은 건,
이 낡은 우산뿐이었다.
그는 문득 멈춰 섰다.
예전의 전시장이 있던 자리.
지금은 철거되어 공터가 되어 있었다.
벽도, 조명도, 작품도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하얗게 보였다.
그는 속삭였다.
“벽이 사라졌는데…
왜 여전히 그리운 걸까.”
눈을 감자,
그 벽 앞에서 웃던 사람들,
그림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빛,
밤새 붓질하던 자신의 손등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한 장의 사진처럼 마음속에 걸려 있었다.
성주의 작업실엔
걸리지 못한 그림들이 쌓여 있었다.
캔버스 옆에 캔버스,
물감 냄새, 먼지,
그리고 조용히 앉은 한 사람의 뒷모습.
그는 그 그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세상에 보여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를 살게 했지.”
그는 조심스레 한 점을 꺼냈다.
그림의 제목은 〈숨〉이었다.
거친 붓질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었다.
“벽이 없어도,
나는 그릴 수 있어.”
그는 조용히 붓을 들어,
창문 밖의 하늘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며칠 후,
성주는 친구 작가들의 연락을 받았다.
“이번엔 우리끼리 거리 전시를 하자.”
그들은 대관료도, 도록도, 광고도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모였다.
도시의 오래된 벽과 철문,
낡은 담장 위에 그림을 걸었다.
처음엔 아무도 서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노인 한 명이 멈춰 섰고,
아이 한 명이 웃었고,
젊은 연인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림은 빛을 받지 못해도,
사람의 눈 속에서 다시 빛났다.
밤이 되자 비가 다시 내렸다.
작가들은 비에 젖은 그림들을 지우지 않았다.
성주는 우산을 덮고,
그 앞에 서서 Enlly Blue - Trough My Soul 을 휴대폰으로 틀었다. 감미로웠다.
그 음악이 골목을 타고 흐르며
모든 그림 위에 흘러내렸다.
반복, 반복, 반복.
그러나 매 순간 다른 울림.
성주는 눈을 감았다.
그는 느꼈다.
이 순간,
그림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며칠 후,
성주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없었다.
“선생님,
저는 전시장에서 당신의 그림을 보고
다시 붓을 잡았어요.
그때 저는 절망 속에 있었지만,
당신의 색이 제 안의 어둠을 비춰줬습니다.
세상에 걸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성주는 그 편지를 가만히 접어
하얀 캔버스 뒤에 붙였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도록이었다.
글자 대신 빛과 숨으로만 읽히는 기록.
봄이 왔다.
성주는 작업실의 모든 그림을 들고 나왔다.
산책로, 버스 정류장, 오래된 시장 골목.
그는 사람들의 눈이 머무는 곳마다
하나씩 걸었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멈춰 섰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성주는 알았다.
“벽이 없어도,
세상은 걸 수 있는 벽으로 가득하다는 걸.”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전시가 시작이야.”
해 질 녘,
성주는 강가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물 위에 반사되어,
그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물감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 손은 주름지고 거칠었지만,
아직 생명의 온도가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내 그림은 결국,
나 자신이었어.
나는 이제
나를 걸어둘 거야.”
그의 말 위로
바람이 스쳤다.
그 바람이 마치
새로운 캔버스처럼 펼쳐졌다.
— 끝 (벽에 걸리지 못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