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검은 구두가 걷는 궤적
[또다시 플릭시아의 조각들]
27. 검은 구두가 걷는 궤적
검은 구두는 낮은 굽이었고, 발끝은 조용히 세상을 걷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신발을 신고 처음 도착한 곳이 플릭시아의 회로였다.
비트도 아닌 리듬 위에서, 발자국은 언어 대신 기억을 새기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 위에 남은 건 발자국이 아니라, 시간의 궤적이었다.
누군가는 그 흔적을 따라 노트를 펼쳤고,
누군가는 그 소리를 따라 오래된 전축을 돌렸다.
검은 구두는 똑같은 길을 두 번 걷지 않았다.
심지어 걷는 순간에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걸음이 끝날 즈음, 그녀는 자신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단 하나, 남은 것은 궤적뿐.
그리고 그 궤적은 말했다.
"나는 나를 지나간 적이 있다."
플릭시아에서는 방향보다 궤적이 중요했다.
그녀는 걷는 동안 문장을 남겼고,
그 문장들이 그녀를 대신해 다음 세계로 이어졌다.
그 신발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구두는 벗겨졌고,
다음 편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