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날

12. 디카시 & 에세이

by 조규옥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더니

이제야 때가 된 모양입니다.

그냥 내준다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알밤 사 형제가 발밑에서 반짝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해맑게 웃습니다.
뾰족한 가시를 앞세우고 중무장한 채
무더운 여름을 지나오며 모진, 비, 바람 속에서도
열매를 꼭꼭 품어 안고 키워 낸 밤나무가 새삼 대견합니다.
급한 마음에 산책길에

서너 번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던 밤나무 열매가
10월 들어 찬바람이 불자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줍니다.
무르익었다는 얘기지요.
무르익어 가는 동안 참고 이겨 내야 했던
인고(忍苦 )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순순히 열매를 내어 준다 것 또 한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인생의 가을이 왔건만 나는 아직 가시를 세우고 세상을 살 때가 많은데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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