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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나는 믹스커피 Jul 22. 2022

나의 꼽추 서예 선생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다 생각난 서예 선생님



어릴 때, 내 남동생은 매우 산만한 녀석이었다.

엄마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동생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호출되었다.


"어머님, 아이가 좀 산만해요. 수업시간에 먼데만 바라보고..

노트 필기를 좀 보세요. 다른 친구들 한 거랑 비교해서 보세요.

가정에서 좀 아이가 차분하고, 집중력을 가지도록 신경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심지어 결혼 전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어릴 때부터 우리의 정서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렇기엔 아빠랑 우당탕 부부싸움을 많이 했지만)

게다가 그때는 한 반에 학생이 55명 정도 되는 과밀학급인데,

동생이 얼마나 눈에 튈 정도로 산만했으면 선생님이 이렇게 까지 얘기할까.

빈 교실에서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학교뿐 아니라, 다니던 학원에서도 종종 동생은 그런 얘기를 들었다.

피아노 학원에서도 미술 학원에서도

"어머님, 애가 집중을 안 하고 친구들하고 장난만 치고.

수업 끝나면 빨리 집에 가야 한다고 좀 일러주세요."


k-장녀 그 자체였던 나는 어딜 가나 모범생 소리를 들어서

엄마가 어깨를 피고 다녔는데, 동생 때문에 엄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는 모범생이었지만, 지거국 입시에 실패하며 엄마의 어깨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산만함에 좋다는 동생의 학원 투어가...

처음엔 태권도를 보냈는데, 육체적 고통을 싫어하는 동생은 맨날 빼먹기 일수였다.

그리고 바둑학원도 좀 다녔다. 거기도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동네 서예학원들 다니기 시작했는데... 거긴 좀 오래 다녔고,

동생이 열심히 다니는 걸 보고 나도 따라다니게 되었다.


우리 동네 서예학원의 가장 큰 특징은 선생님이 난쟁이 꼽추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30대쯤 되었던 그 선생님은 큰 장애를 가진 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하며,

오히려 학생들이랑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서예 특성상 괜스레 고리타분할 것 같았는데,

그 선생님은 매우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부산 사람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도 잘하고,

서예도 꽤 잘 쓰셨다.


고학년 학생들의 고민상담도 잘 들어주시고,

(그래 봤자, 그거 별일 아니야, 뭘 그런 걸로 고민해..가

대부분의 해법이었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방과 후 서예학원에서 먹을 갈고

선생님이 예시로 써준 글씨를 따라서 수십 장 썼던 그 시간들이

그 시간이 무색하게  지금까지 나도 내 동생도 내놓으라는 악필이다.


그 서예학원 옆 옆 건물에 한의원이 있었는데,

그 한의원 선생님은 소아마비로 심하게 다리를 저는 젊은 한의사였다.

그런데 용모가 매우 지적이고 곱상하여 당시에 동네에

박신양 닮았다는 얘기가 많이 돌았었다.


소풍을 갔다가 다리를 접질려 한의원에 다녔는데, 진료실에서 진찰을 받고

침구실에 앉아 있는데 다리를 접질린 나보다 더 심하게 다리를 기우뚱기우뚱하며

침을 놔주러 오는 선생님을 보고 처음에 약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침을 맞고, 피를 뽑고 나니 다리가 너무 씻은 듯 낫는 거 아닌가.

아니 이 분 화타?!

알고 보니 동네 주부님들에게 인기 최고인 한의사 쌤이였다.

한의원이 마칠 시간쯤 동네 아줌마들이 아무 일도 없는데 지나가다

선생님께 간식을 갖다 드리고 오는걸 종종 봤다.


나도 그때 이후 그 한의사 선생님과 친해져서 단골이 되었고,

감기에 걸려도 내과나 이비인후과를 안 가고 그 한의원에 갔었었다.

심지어 감기약도 잘 들었다.


그 한의사 선생님은 내가 처음으로 흠모한 남자 사람이기도 했다.

침을 맞는 동안 영화 얘기도 하고, 학교 얘기도 하고...

대학을 졸업했을 땐 내 첫 소개팅을 주선해주시기도 하셨다.


어릴 땐 그분들이 겪었어야 할 편견과 불편부당함에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냥 실력이 좋고, 성격이 좋은 직업인이자 어른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들과의 자연스러운 교감이 그 동네를 사는 많은 친구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시선을 갖게 한 것 같다.

 

그들은 특별히 불쌍하지도 않고,

(불쌍하기는커녕 우리보다 뛰어난 지적 능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체적 불편함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거 말고는  친구가 되거나 사제지간이 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엄마나 동네 분들도 저렇게 장애가 있어도 본인의 전문성이 있고, 직업활동을 하는데  

더 존경해야한다는  분위기였다.


카페의 단골손님 중에서도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 있다.

매일 오후 전동휠체어를 타고 오시는데, 가게 문에 턱이 있어서 매장 안으로는 못 들어오시고

밖에서 주문을 받는다.

계산대에서 문까지 가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어서 다시 갖다 드리는 게 어렵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입구에 턱이 있어서 매장 안으로 못 들어오시는 게 내 쪽에서 미안해해야 할 일이다.


장애를 가지신 분들의 일상이 더 커지고,  당연해야

편견이나 불편부당에 대한 얘기가 더 줄어들 텐데,

내가 어릴 때에 비해 오히려 일상에서 장애인 분들을 만나는 일이 별로 없다.


자폐스펙트럼은 장애와 좀 더 다른 영역이지만,

꼭 드라마 속 변호사처럼 직업인으로 기능성이 높지 않아도

몸이 좀 불편한 거 말고는 같은 사람들인데 함께 잘 살아보도록 하는 게

다 좋은 거 아닌가.


서예 선생님과 한의사 선생님은 잘 살고 계시려나?

좋은 분들이셨는데....

*남동생은 지금 생각하면 아동 adhd였던것 같다.

*선생님과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게 남동생은 고등학교때 정신차리더니 인서울 대학교의 공대를 갔다. 받아쓰기는 20점이였고 구구단도 못 외우던 아이는 캐나다 어학연수도 갔다왔고 대학수학공업수학 다 학점 받고 졸업했다.

지금은 연봉을 높혀보겠다고 이직준비중인 직장인이다.


인간은 어느 한 시절 열등 할 수도 있고,

어느 한 부분이 열등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닐 뿐더러

그렇게 보는 내 자신이 많은 좋은 인연과 가능성을

좁혀갈 뿐이다. 권모술수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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