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처음으로 닿아 그 멋과 맛을 발견한 여수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그 후로 아내에게 '여수에 같이 가보자'며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이번에도 새벽 기차와 밤늦은 기차로 다녀오는 하루 기차여행으로 계획을 짜고 아내의 결재로 출발 준비는 일찌감치 끝냈다.
2월의 마지막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새벽부터 SRT에 몸을 실었다. 아직은 겨울 새벽 공기가 제자리를 떠나지 않은 계절이지만 나란히 앉은 열차 안의 포근함이 여수 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 층 더 데워놓는다. 익산에서 모닝커피 한 잔과 함께 KTX로 갈아타면 그 기차는 여수엑스포역까지 달린다.
여수에서 아침식사. 10시 30분
우리가 탄 열차는 여수엑스포역에 10시 17분에 도착했는데, 커피 한잔과 빵 한 조각으로 간신히 아침 허기를 채운 터라 무척 배가 고팠다. 간장게장을 좋아하는 아내의 입맛에 맞춰 미리 정해놓은, 여수에서 잘 알려진 간장게장 식당으로 직행했는데, 10시 30분을 막 가리키는 시간에 그 큰 식당은 벌써 빈자리가 없다 싶은 정도로 손님으로 가득 찼다.
여수 꽃돌게장1번가. 기업화된 식당답게 규모와 체계적인 서빙이다. 서울에서 유명한 꽃게장 집에 비해 훨씬 싼 가격에 더 맛있는 게장 인증!!! 둘이서 왕꽃게장 하나 씩.
원래 게장 맛을 몰랐던 나는 결혼 후 아내 덕에 게장 맛의 신비를 알게 된 축에 속한다. 서울에서도 웬만큼 게장으로 유명하다는 집은 들러보았지만, 여수 여행이라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단연 이번 게장 맛이 으뜸이다. 자율배식 코너도 있어서 무한 리필 돌게장과 여러 반찬들이 즐비했지만, 살이 꽉 찬 꽃게장과 게 뚜껑에 비벼 생김에 싸 먹는 밥으로도 충분했다.
먹을게 많은 여수라 꽃게장과 함께 나온 수북한 밥 한 그릇을 보고 '절대 이걸 다 먹을 리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어느덧 그 큰 밥그릇엔 쌀 한 톨 남겨지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큰소리 치면 안된다. ^^;
오동도 산책길
서둘러 소화를 시켜야 해서 다음 코스는 오동도 산책. "이게 등산이지 산책이냐"며 투덜대는 아내를 달래 보려 먼저 얼굴을 내민 부지런한 동백꽃이 있나 둘러본다. 제주의 동백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는데, 육지에서의 동백은 '겨울의 끝'을 알린단다. 그래서인지 흔히 봄꽃 무리에 끼지 못하는 동백이지만, 오동도를 덮고 있는 동백나무에 이렇게 간간히 비치는 빠알간 동백꽃을 보니 이젠 봄이구나 싶다.
이제 막 피어나 아내의 마음을 달래줬던 고마운 동백꽃들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낮 기온은 영상 10도를 넘어가며, 햇볕도 너무 좋아서 겨울바다가 무색해질 정도였는데, 환한 빛을 받은 오동도 앞바다는 맑은 옥빛의 물결이 비렁(벼랑)에 출렁인다. 이미 몇 개월 전에 들렀던 곳이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아내와 다시 찾은 오동도는 눈 부시다.
오동도 용굴 근처에서 바라본 여수의 바다
오동도 등대 근처의 대나무 터널
고소동 벽화골목 오후 2시
오후에 접어들면서 꽤 따뜻해졌다. 선블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아내는 햇볕을 피해 다닐 정도로. 오동도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택시로 이곳 고소동 벽화골목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새벽부터 바쁜 두 다리도 잠시 쉬게 할 겸, 화창하기 그지없는 겨울 끝의 여수 앞바다를 전망 좋은 곳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담아가고 싶었다.
화려한 색깔에 이끌여 들어간 스티커 사진 샵. 한 껏 장난스런 소품으로 단짝 친구나 커플들만의 추억을 남기는 곳인가 보다.
과거에 런던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을 때, 가족보다 먼저 도착한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머물 집을 보러 다닌 적이 있다. 영국의 날씨가 그렇듯 우울한 흐린 날씨가 이어지다가, 현지 부동산 사무실과 약속을 잡고 집을 보러 다닌 날은 드물게 화창했는데 모든 집들이 너무도 좋아 보였다. 다행히도 계약만은 미룬 탓에 아내에게 혼쭐나는 건 면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동네와 거리에 대한 감상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행운이다. 이른 새벽 아내를 깨워 찾은 여수가 그리도 밝고 따뜻했으니 말이다. 하얗게 덧칠된 채 버려진 듯한 창고는, 유럽의 그곳들처럼 내부를 잘 다듬어서 천정이 높은 레스토랑을 하면 좋겠다던가, 해안가 전망이 좋은 저 집은 얼마일까? ㅎㅎ 중년부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되나 보다.
벽화골목 이순신 광장로 쪽 입구
상상했던 것보다는 좁고 구석진 동네에 조성된 벽화골목이다. 낭만포차로 유명세를 타는 여수 해변길에서 가까운 탓에 몇몇 20-30대 커플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금요일이어서인지 한적하다. 유머스런 만화작품들을 읽어가며 여유로운 여수의 오후를 즐긴다.
자전거 에피소드를 소재로 그려진 벽화. 해안가 비탈진 동네에 위치한 골목길이다 보니, 해안가로 드리워지는 햇볕이 벽화들에 환한 천연 조명 역할을 해준다.
복권을 파는 마트 조차도 예술적 감각으로 가득하다.
좁은 골목에서 나와 다음 골목길로 가기 위해 잠시 탁 트인 도로에서 만난 강렬한 삼원색과 예쁜 옥외 테이블로 꾸며진 가게가 '복권 마트'라는 걸 알고는 웃음이 나왔다. '일등'이라고 쓰인 소박한 마케팅 문구에도 이곳은 당첨금을 많이 탈 수 있는 의미의 '일등'이 아니라, '행복 당첨'이라고 내겐 읽혔기 때문이다. 꿈을 그리는 몇몇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법한 '사진관'이나 '라면집'같은. 저 예쁜 테이블에 남녀 둘이 앉아 복권을 긁는 모습을 상상하니 좀 더 행복해지긴 했다. ^^
근처에서 나름 많이 알려진 카페 중의 하나인 듯하다. "낭만 카페"의 루프탑에 만들어진 인스타 스팟. 사진에 까다로운 아내의 취향에 맞춰 한 50장 즈음 셔터를 눌렀다. ㅠㅠ
카푸치노와 넌-알콜 칵테일
여수 여행에서 "이순신 광장"을 피해 다니긴 어렵다. 벽화골목에서 다음 코스로 나서려니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구석구석 잘 다듬어진 벽화마을의 내리막에선 여수 시내와 바다가 소박한 집 지붕들과 잘 어우러져 그림같이 펼쳐진다.
이순신 광장 쪽으로 향하는 벽화골목.
이순신 광장 근처에는 '선어회'시장이 있다. '선어회'란 '활어회'와는 달리 숙성을 시킨 회를 뜻한다. 아침나절에 계절 생선들과 조개들이 배로 이곳 시장으로 모아져서, 내장을 깔끔하게 빼낸 후 얼음으로 숙성 처리를 시작한다. 그래서 시장 모든 상점에는, 서울의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가락시장의 모습과는 달리, 얼음상자에 놓인 생선들을 볼 수 있다. 여수에 있는 선어회 식당들은 대부분 이곳 시장에서 삼치와 민어 선어회를 떼어다가 식당에서 다른 반찬들과 함께 내어놓는다. '선어회'라는 말을 처음 들은 아내에게, 한 번 먼저 와 본 어설픈 여수 여행 선배인 내 강의가 이어졌다. 팩트체크는 안 할걸 잘 아니, 재미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곧 문수동에 위치한, 여수 사람들이 주로 간다는 곳에서 선어회를 먹어볼 계획이어서 평소에 회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선어회에 대한 호기심으로 입맛을 돋워볼 요량이다.
그러는 사이, 이순신 광장에 위치한 "여수 딸기모찌(찹쌀떡)"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 옆엔 수제 바케트 버거와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여수당"도 있지만, 주문을 기다리는 늘어선 대기줄의 길이로만 가늠해보면 "딸기모찌(찹쌀떡)"이 훨씬 인기가 높은 듯하다. 지난번에 들렀을 땐, 긴 줄에 겁을 집어먹고 여수당 아이스크림을 먹었었는데, 이번엔 집에서 공부에 열심인 막내에게 줄 선물로 딸기모찌(찹쌀떡) 5종 혼합세트 하나를 샀다. 4만 원인데, 찹쌀떡 하나에 4천 원인 셈이다. 가족 모두 깜짝 놀랄 맛이긴 했지만, 아내는 싸지 않단다. 그도 그럴 것이, 조그만 가게 안쪽으로 찹쌀떡을 손수 빚는 주방엔 찹쌀떡을 만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셈이다.
일본에서 할머니께서 직접 전수받아오셨다는 딸기 찹쌀떡은 순천에 자리를 잡았고, 그 손녀께서 이곳 여수에 새로운 감각으로 가게를 여셨다는 "여수 딸기 모찌(찹쌀떡)"
여수의 맛, 선어회 한 상. 오후 4시 30분
이젠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 여수의 맛을 본격적으로 탐험할 시간이다. 여수는 근처에 있는 아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도 그곳이 맛집일 만큼, 음식이 맛있단다. 하지만, 게 중에서도 유명 관광지보다는 여수시민들에게 알려진 좀 더 여수의 맛에 가까울 것 같은 선어회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미리 찾아낸 곳은 여수 문수동에 위치한 "조일 식당"이다. 이순신 광장에서 15분 정도 택시를 타고 이동한 곳인데, 주택가 한 골목에 그냥 동네 식당처럼 간판과 식당 문이 얼기설기 서있는 곳에 도착하자 잘 못 온 것은 아닌지 지도를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밖엔 없었다.
하지만, 소박한 가게문을 열자마자 제대로 온 걸 알게 된다. 오후 4시에 오픈하는 가게에 겨우 30분이 지난 시간이지만, 빈 테이블이 겨우 두 개에 남았다. 관광객들로 보이는 테이블은 없어 보였고, 동네에 사시는 듯한 가족단위 손님들로 들어찬 가게다. 물론, 한 두 팀 정도 우리처럼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수 여행객들도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6시가 되기 한참 전부터 가게 앞엔 대기줄이 만들어진다.
'선어회'는 '활어회'에서 맛볼 수 있는 쫄깃함이 덜하다. 게다가, 대부분 낮에 들렀던 '선어회 시장'에서 똑같은 선어회를 떼어다 각 식당 냉장고에서 나머지 숙성을 거쳐 손님 식탁에 내어 놓기에 많은 식당들이 그날 들어온 선어회 시장의 '운'에 따라 선어회 맛을 타게 된다. 다만, 선어회는 여수의 장맛과 갓김치와 같은 토속 음식들과 조합이 되는 데 그 독특함이 있다.
하나같이 소박해 보이는 그릇들이지만, 가득 찬 감칠맛이 모든 접시로부터에서 젓가락에 실려오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심지어, 사진 좌측 상단의 고구마도 예사롭지 않다. 처음엔 여느 가게처럼, 공장에서 납품받은 흔한 밑반찬이라 여기고 난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눈썰미 좋은 아내는 가게 한쪽에 쌓인 '영암군 꿀고구마' 상자를 발견하고는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식탁 위에 올려진 고구마를 맛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 번 먹어보란다. '세상에' 이렇게 달고 찰지게 여문 고구마는 처음이다. '영암군'이란 글자를 꼭 기억해야겠다. 나중에 막 튀겨낸 고구마를 디저트 삼아 테이블마다 나눠주시는데 고소하고 달달한 고구마가 정말 제대로다.
삼치와 민어 선어회. 사진 좌측 구석의 간장 소스와 묵은지, 여수 돌산 특산물 갓김치, 생김의 조합은 지금도 잊지 못할 맛이다.
서시장, 교동 포차 저녁 7시
아내는 전통시장 구경을 좋아한다. 서울 자양시장, 강릉 중앙시장, 영덕 5일장 시장, 어디를 여행해도 꼭 그곳 전통시장을 찾는다. 선어회를 먼저 먹는 일정 탓에 6시를 넘겨서 도착한 여수의 "서시장"은 이미 조용해졌다. 아직 문을 연 몇몇 점포들 조차도 문을 닫을 채비가 한창이다. 이번엔 아쉽지만, 떠들썩했을 법한 서시장의 한낮을 상상하며 김부각 한 봉지를 사서 빠른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한다.
금요일 오후 6시 40분 서시장.
하루 장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하는 서시장 상인들
서시장은 여수 "연등천"을 끼고 조성이 되어 있다. 연등천은 곧장 여수항으로 흐르는데, 서시장을 나와 열차시간에 맞춰 여수엑스포역으로 떠나기 전, 아내에게 여수 앞바다의 "낭만포차"거리를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 남으면 소주도 한 잔 하고. 서시장에서 나온 우리는 연등천 주변에서 길게 늘어서 연등처럼 빛나는 오렌지 천막 포차들을 발견한다. 그 입구에는 "교동 포차"거리라고 쓰인 꽤 잘 만들어진 안내표시등도 있다. 낭만포차 거리처럼 관광객과 젊은이들로 분주하진 않지만, 포차마다 한 것 즐거운 웃음으로 가득한 거리다.
결혼 전, 포장마차에 자주 들렀던 아내와 나는 길을 걷다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즐거워하며 오랜만에 시장 옆 전통 포차를 거닐었다. 기차역에 도착하기로 계획한 시간까지는 약 40분 정도 여유가 있다. 관광객 가득한 "낭만포차" 보단 여기 "교동 포차". 이건 우리 여수 여행을 축복하는 신의 계시야~ ㅎㅎ 아내의 동의하에 게 중에 맘에 드는 포차 하나를 골라 들어섰다.
연등천과 서시장 옆 교동 포차 거리
사실, 포차의 안주에 맛을 기대하진 않는다. 분위기다. 과거 친구들과 어울려 한창 술을 즐길 땐, 2차나 혹은 3차로 마무리를 위해 들르는 곳이 '포차'였던지라, 주인아주머니의 특별한 손맛이 깃든 안주가 나온 들 술에 이미 취해버린 혀가 그 맛을 알아채기도 어려웠던 듯하다.
하지만, 여긴 전라도 여수다. 주인아주머니께 배부르다고 말씀드렸더니, "금풍생이"튀김 안주를 추천해주셨는데, 직장 동료가 여수에 가면 꼭 맛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반색하며 주문을 했다. 아내와 나는 또 한 번, 여수를 칭찬한다. 알고 보니, 금풍생이는 먹을게 별로 없을 만한 날씬한 생선인데, 바싹한 식감과 여수의 김치, 장맛과 어우러지며 여수 하루 여행의 마지막 시간을 그렇게 채워주었다.
교동 포차에서 금풍생이
지난 목포 여행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중년이 되어서야 찾게 된 여수. 음식마다 깃든 깊은 감칠맛을 느낄 때마다 전라도는 보통의 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지혜로 이런 음식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짧은 여행이었지만, 아내와 이곳에 들러 함께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