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일등' 한 번 못해본 사람 있어?" 라며, 자신의 소싯적 얘기를 농담 삼아 주고받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직장생활로는 "나도 잘 나가던 사람이야~"라는 대화 속의 농담처럼 흔한 추임새 같은 말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처럼 내게도 그런 행운들이 있었다. 일찌감치 쏘아 올린 글로벌 어워드(Awards) 수상, 영국에 위치한 부서의 'Head of Office' 직함, '어느 어느 부서의 핵심축' 등등. 나의 30대를 우쭐하게 만들었던 수식어들이다.
그렇게 구름 위를 떠다니다가 어느 날 40대에 다다르자, 큰 변화가 생겼다. 내가 리딩하고 관리해야 할 팀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채 큰 책임을 맡다 보니 버거웠다.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사람들과의 의견충돌도 잦았다. 긴 실무적 경험과 팀워크 경험에서만 배어 나올 수 있는 통찰력도 부족했고, 팀을 지탱하고 더 나아가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은 개인의 욕망에 사로잡혀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나는 스스로 결심해야만 했다.지금이라도 부족한 것을 채우고 내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자. 팀은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맡으면 되니까, 지금 떠나자. 새로 시작해 보자.
되찾은 일하는 재미
새롭게 자리 잡은 부서는 지역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무엇보다 목적과 역할이 사뭇 다른 곳이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과 일하며 IT서비스를 시장에 내어놓는 일인데, 그것도 디지털 광고 플랫폼을 설계하고 '매출'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무척 어려웠다. 게다가, 디지털 광고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구글, 메타플랫폼으로 이름을 바꾼 페이스북, 아마존 등)을 중심으로 성장한 영역이어서 아직, 회사 내는 물론 국내 전문가가 많지 않아, 미국 서부의 실리콘 밸리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배워나가야 했다. 모든 업무가 영어로만 이루어지다 보니 전문지식 부족에 더해 언어장벽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흥미진진했다. 처음엔 처음 만난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모두가 똑같이 생소한 분야에 도전해야 하다 보니 '바보들의 행진'과도 같았다. 모두가 훌륭한 두뇌와 자질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디지털 광고 플랫폼은 모두에게 처음부터 배워야 할 새로운 공부 과목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그러나, 서로가 친밀했고,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했다. 무엇보다 내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었는데, 고객과 사용자의 니즈를 플랫폼 간의 네트워크 기술이나 데이터를 활용하여 서비스 구현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신세계'였다. 아직도 나는 '소프트웨어 문외한'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져 갔고, 더 많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또 한 번의 결심
60여 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나는 가장 연장자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오로지,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 자체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우리의 협력부서의 북미의 동료들(전문가들이다.)은 아예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자극이 되었던 것은 이 북미의 동료들과의 함께 일 할 때면 느끼게 되는 호기심과 흥분이다. 대부분 각각의 주요 프로덕트를 책임지는 리더들이었는데, 일하는 스타일이나 개성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이 보유한 경험과 논리적 접근 방식은 늘 나를 깨우는 각정제와 같았다.
나도 저기서, 저들과 일해봐야겠다.
미국으로의 이직을 결심한 순간이다.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미영주권이 필요하다는 것도, 채용 프로세스가 대단히 까다롭다는 것도, 내가 내린 결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깨달아가기 시작한 지점이다. 그리고, 코로나가 찾아왔다.
코로나가 벌어준 시간
코로나는 미국 이민국 업무를 마비시켰다. 코로나 이전에는 1년 반 정도의 시간이면 최종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던 영주권 심사 과정은 2년 8개월 만에 끝났다. 40대에 시작했던 나의 미영주권 프로젝트는 50대를 넘어서 곧 50대 중반을 바라봐야 하는 시점에 끝이 난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늦게 시작한 이 늦깎이 도전을 무심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욱 해묵게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한 일은 꼭 끝을 보는 성격이 크게 한 몫했고, 딱히 다른 걸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코로나로 수혜를 본 여느 빅테크 기업의 사업들처럼 우리 디지털 광고 사업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바쁜 업무로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느리더라도 가보자.
부족하게 느껴왔던 실무적 이해도와 경험을 쌓아나갔다. 코로나가 3년이나 갈지 누가 알았겠냐만, 이 3년은 오롯이 나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여전히 까다롭고 힘겹게 하는 직장생활의 그것들이 나를 녹다운시키곤 했지만, 분명했던 것은 나는 어제보다 오늘이 나았고,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팀을 관리하고 리딩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의 무지해던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애썼고, 어려운 과정을 함께해 온 팀원들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 갔다.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50대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