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쓴다는 것.
12월 5일 월요일.
회사 인사 담당자의 안내로 퇴직원을 써서 제출한 날이다. 한 회사에서 딱 한 번 해볼 수 있는 일인데, 궁금했었던 그 일과 절차를 지금 확인하는 중인 셈이다. 인사 시스템을 통해서도 절차를 챙겨보는 중에 나의 회사생활에 대하여 차트처럼 요약된 페이지를 보게 되었는데, "근속기간"이라 이름 붙여진 박스에 채워진 숫자가 눈에 띄었다. 인생의 어느 정도 시점이 되면 나이를 잊듯, 회사 생활도 이 정도 되니 내가 이 회사와 얼마동안을 함께 했는지 평소엔 인식하지 못했었나 보다.
좋게 본다면야,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회사를 떠나겠다'던, 내 버킷 리스트 상단에 위치한 굵직한, 치기 어린 아이템 하나에 시원스레 줄을 그은 셈이다. 사실 버킷 리스트엔 "사표 던지기!"라고 쓰여있긴 했다. ^^ 또 한편으론, 오랜 세월 성실함으로 지어 올려 편안하고 아늑하기 그지없는 내 것만 같은 착각까지 이는 이 공간에서, 춥고 안개 자욱한 문 밖으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 떠미는 사람도 없는데 제 발로 말이다.
반납
처음 해보는 퇴사의 마지막은 '자산 반납'이었다. 내가 사용하던 컴퓨터를 포함한 저장매체들, 샘플디바이스들을 빠짐없이 체크해야 한다. 만약, 시스템에 누락된 게 있으면 등록부터 새로 한 후, 폐기하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기기들은 반납을 해야 한다. 건물과 건물사이를 이동해야 해서 커다란 카트에 내가 사용하던 기기들을 옮겨 싣고는 긴 걸음으로 오랫동안 머물며 에너지를 쏟았던 캠퍼스 구석구석을 기억 속에 타투라도 새겨놓으려는 듯이 스캐닝했다. ID Card(사내 신분증이자 출입을 할 수 있는 키와도 같다)를 최종 반납하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에.
IT서비스 업계에서 만난 선후배들이나 동료들, 북미에서 원격으로 함께 일하는 멤버들을 보면 퇴사나 이직은 흔한 일이다. 특히, 미국 실리콘 밸리의 직장인들은 2-3년에 한 번씩 이직을 통해 경력을 개발하고 지위도 높여나간다. 연봉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이 업계에 뒤늦게 발을 디딘 나를 포함하여, 다른 업계에 있는 많은 오랜 지인들은 오랫동안 한 회사에 머문다. 안정적이고 복지가 좋은 대기업일수록 더 그런 듯하다. 아침마다 비디오콜을 통해 협업을 하는 북미 실리콘 밸리 멤버들도,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이면 이 놀라운 근무기간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중에 한 친구는 자신이 이 회사에 조인하기 훨씬 전부터 일해온 나였기에 언제라도 그녀 자신이 먼저 이직을 하게 될 것이고 그 후에도 나는 이 회사에 계속 머물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여겼었단다. 그래서, 나의 이직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뉴스여서 신기하게만 느껴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러게 말이다. 내 인생의 첫 퇴사 이벤트가 네가 있는 동안 생길 거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니?' ^^
이직한다는 것
오랜 세월 함께한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실질적 고민도 있고, '혹여 감정이 북받치면 어떡하나, 후배들 앞에서 그건 창피할 것 같은데...' 하는 감성적인 걱정도 있다. 실제로 원온원(1on1, 개인면담)을 통해 직접 내 퇴사 계획을 듣던 후배의 눈시울이 붉어질 때면 잠깐 말하는 것을 멈추고 서로의 호흡을 골라야 할 때도 있지만, 퇴사를 실감하게 되는 때는 한 명 한 명 귀중했던 동료, 선후배가 글을 통해 따뜻한 진심을 전해주는 순간들이다. 내가 일하며 거둔 성과들을 돌아보는 것들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뭉클함이 일게 만드는데 이런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싫든 좋든, 나의 자의였던 타의였던,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이들을 통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함에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을 듯하다.
오랜 직장 생활을 하며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마다 더 나은 한 해를 기원해 보곤 하지만, 어떨 땐 내가 대형 회전문 속에 갇혀 끊임없이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인생에서 만나는 문은 그 종류가 다양할 텐데, 영화 매트릭스의 열릴 때마다 시공을 초월하는 문, 세상 밖으로 나서는 문, 새로운 도시로 들어설 수 있는 문... 모두가 자신들의 꿈을 향해 그 문들을 열어젖힐지 말지 선택한다.
'이직' 그 자체가 나의 꿈일리 없다. 하지만,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문들 중에는 '이직'이라는 열쇠를 필요로 하는 그것도 있다. 어차피 문이 열리고 그 문을 나서 보지 않고서는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문을 열 수 있는 용기와 열쇠. 이번 늦깎이 미국 이직을 통해 새로운 열쇠 하나를 또 깎기 시작한 셈이다. 아직 많은 시간이 내게 남아있고 먼 길을 가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