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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자전거 여행, 영월 라이딩

별마로 천문대, 수라리재, 김삿갓재, 영월 스포츠파크


자전거를 좀 탄다는 이라면 한 장쯤은 가지고 있는 이미지 컷이 있다.   이미지 속의 장소는 영월 봉래산 정상에 위치한 별마로 천문대와 천문대 활공장.   그곳엔 봉래산 정수리에 점처럼 오똑 솟은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이 표지석을 놓고 '천리길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 혹은 '봉래산 정상 바람에 온몸이 날려버린 듯', 카메라 앵글 트릭(Trick)을 이용하여 다양한 씬(Scene)을 연출한다.   마음에 쏙 드는 한 컷을 얻으려 여러 번 포즈를 고쳐가며 셔터를 눌러대는데, 운이 좋다면 누군가에겐 재미진 인생 샷이 되기도 한다.      


     




새벽 5시 39분: 출발.


기온이 하루 만에 갑자기 뚝 떨어져 버린 가을 새벽 4시, 아침 기상 습관을 깨는 시간이라 잠을 쫓아보려 눈꺼풀을 다림질이라도 하듯 부벼보지만 천근만근이다.   어제 퇴근길엔 따뜻한 가을 져지도 한 장 새로 장만했다.   출발장소에서 일찌감치 만난 동료들과 차가워진 날씨 얘기로 반갑게 그리고 들떠서 신이 나 어쩔 줄을 몰라하는 아이들 같은 인사를 나누며, 자전거를 버스 뒷좌석 쪽에 차곡차곡 엊걸어 묶는다.    


05:39 잠을 설친 모두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곯아떨어졌지만, 얼마쯤 지났을까, 떠오른 아침햇살에 눈을 뜨고, 치악산 휴게소의 뜨끈한 국물로 허기와 한기를 데운다.


오늘의 장거리 라이딩은 "영월 스포츠파크"를 기점으로 하는 순환코스인데, 영월군 일대 봉래산, 망경대산을 끼고도는 공도를 따라 세 개의 정상(별마루 천문대)과 고개(수라리재, 김삿갓재)를 이어 넘는 코스다.   총 코스 거리 93km, 누적 고도는 1,900m가량 되는데, 로드바이크 루트로는 중상급 코스에 해당할 듯하다.   추위도 그렇고 높은 고갯길들이 말해주듯 쉽지만은 않을게 뻔하다지만, 이번 라이딩은 온몸을 감싸는 숲 속의 가을 공기와 형형색색 주변을 가득 적신 가을빛깔이 기대되는 그런 여행이기도 하다.        


08:39 영월 스포츠파크에 도착하니 봉래산이 체육관 너머로 선명이 나타난다.   그 꼭대기엔 첫 번째 목적지인 별마로 천문대.   아래서 바라보니, 그 높이가 더욱 높다.



오전 9시 8분: 동강을 따라.


영월의 유명한 동강 물줄기를 따라 천문대를 향해 열 대의 로드바이크가 출발한다.   영월 스포츠파크에서 천문대로 향하는 길은 영월군을 관통하는데, 근육에 열이 오르기도 전에 오르막은 시작되고 이내 거친 호흡으로 이어지지만, 오늘 라이딩의 가장 어려운 코스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된 탓인지 불평하는 이는 없다.


09:08  라이딩 시작


영월군을 벋어 나자마자, 서울 남산의 업힐 오르막을 떠올리게 하는 경사도의 약 3.5km 남짓한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아침 찬 공기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한 워밍업이다.   "삼옥재길"을 따라 초입의 업힐을 마치고 나면 삼옥재길은 아래로 향하지만 그 오른편으로 "천문대길"이 높은 경사로 뻗으며 천문대를 향한다.  


09:38 천문대 본격 업힐 직전


그 지점부터 천문대까지는 4km가 넘는 평균 7.7%의 쉽지 않은 업힐이자 오늘 라이딩의 메인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한여름에 왔더라면, 숲 그늘이 너무도 시원했을 법한, 지금은 붉게 물들어가는 우거진 봉래산 자락이 신선한 내음으로 가득하다.   마냥 힘들기만 할 것 같은 업힐 오르막이지만, 버스도 쉽게 오르내릴 듯 넉넉하게 휘어져 오르는 헤어핀 모양의 도로에서 가끔은 숨을 돌릴만한 여유도 찾는다.                         



오전 10시 27분: 하늘 날다.


모두가 제각기 다른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아오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SNS를 통해서만 보아오던 다른 이들의 멋지고 개성 넘치는 사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차리면서 한 명 한 명 만들어내는 슬랩스틱(Slapstick) 코미디에 시끌벅적해진 천문대 활공장은, 봉래산 정상의 찬바람이 이들 다 큰 어른들의 열기를 한기로 식혀놓고서야 다시금 그 고요함을 되찾는다.  이러다 해질라.   


10:27 이렇게 해서~
이런 이미지들을 얻는다. ^^


오후 12시 49분: 선물, "수라리재" 다운힐.           


별마로 천문대의 힘겨운 업힐로 하루를 시작해서인지 "수라리재"는, 아침부터 에너지 소모가 컸던 라이더들의 배고픔보다 힘겹지는 않은 듯하다.   천문대와 수라리재 사이에 마땅한 음식점이 없었기에 수라리재 업힐 라이딩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라도 마쳐야만 했다.   


수라리재 초입
수라리재
12:49 깔끔한 비주얼의 수라리재 남동편 다운힐


수라리재의 다운힐은 예상치 못한 세련미와 깔끔하게 다듬어진 헤어핀 커브길 풍경을 사진에 담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일대가 동강이라는 잘 알려진 관광명소여서인지는 몰라도, 인적이 드물 것만 같은 곳이지만, 부지런한 손길이 닿은 흔적과 평화로운 정경들이 도시에서 찾은 라이더들을 편안하게 맞아준다.      



오후 1시 6분: 시골밥상


계획보다 1시간이나 늦어진 점심이다.  그 탓인지, 수라리재를 오르기도 전부터 아우성이었던 동료들의 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동면의 조그만 마을 시골밥상에 올라온 시골된장찌개와 찬들이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원래 내가 아는 강원도 음식이 그렇듯, 흙에서 갓 캐어낸 재료와 양념인 듯 이 밥상도 집밥의 절대지존이다.   


13:06 중동면


식사를 즐기며 허기가 가시자, 다음 코스를 어떻게 정할지 의견이 분분해진다.   "시간도 늦었고, 힘도 드니 김삿갓재는 그냥 스킵(Skip)하자.", "무슨 소리, 여기 우리가 또 올까.", "김삿갓재를 그냥 지나친 스트라바(스포츠 앱) 기록... 후회할 거다."  농 섞인 주장들로 한 바퀴 도니, 금세 정리가 된다.   먼 영월에서 이 고생을 하면서, 코스 한 구석이라도 '포기'라는 기억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김삿갓재로 향한다.         



오후 3시 31분: 장거리 로드바이크 라이딩의 대미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 라이딩의 가장 고비는 김삿갓재이다.   별마로 천문대 업힐보다는 1~2km 짧은 거리지만, 중간중간 숨 돌릴만 한 완만한 경사가 있었던 그곳과는 달리, 김삿갓재는 6km 가까운 오르막 업힐을, 단 한 곳을 빼면, 쉼 없이 올라야만 했던 것 같다.   친구들 미안허이~.


김삿갓재는 표지석이나 푯말이 없어 "모운동길"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나 다운힐이 시작되는 걸 보고서야 재를 지나왔음을 눈치챌 수 있다.   혹은, 로드바이크 루트를 지나올 때 간간이 이어져있던 MTB바이크 루트는 재를 지날지도 모른다.   경사도 높은 구간을 지나 평지에 가까운 구간이 한동안 이어지다 본격적인 다운힐이 시작될 즈음, 앞선 동료들과 함께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바람막이도 다시 챙겨 입을 겸, 뒤따르는 동료들 모두가 무사히 합류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다운힐이 시작되면, 꽤 먼 거리를 빠른 속도로 내려가야 하는 데다, 중간 샛길이나 다음 도로 합류 지점까지 가는 동안 낙오하는 동료가 없도록 중간중간 인원점검도 할 겸.


15:31 김삿갓재


쌀쌀했던 바람으로부터 한낮 동안은 우릴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고마운 가을 햇살은 이제 노란 빛깔을 내며 오늘 하루를 위한 기력이 다했음을 알린다.  오후의 반나절이 지난다.   영월 스포츠파크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26km다.   뒤따라 도착한 동료들도 차가워진 바람 속을 한동안 내려 달려야 함을 알기에 하나 둘 바람막이를 걸친다.   지금부터는 장거리 로드바이크 라이딩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다.   


장거리 로드바이크 라이딩의 시작은 아침 상쾌한 공기와 함께 웃음으로 환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슴 터지게 하는 업힐이던, 온몸을 흠뻑 적셔내는 고강도 스프린트이던 첫 번째 고비를 넘기고 난 순간은 희열로 가득 찬다.   다양한 레퍼토리 하나하나에 반한 나머지 힘겨운 줄도 모르는 절정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햇살의 빛깔과 달라진 공기의 기운을 느끼고서야 그날의 에너지를 거의 다 방출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때 즈음이면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   돌아갈 수도, 중간에 포기하고 점프(차나 다른 교통편을 이용)를 하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로드바이크 자전거 라이딩을 두고 '완주의 스포츠'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4시 55분: 그렇게 중독된다.


남은 파워를 짜내어 목표한 지점까지 마지막 고개를 넘으면 늘 그렇게 일부러 연출이라도 한 듯이, 그 마지막 고개 너머엔 오렌지 빛으로 가득 메워진 반대편 산자락이 서사영화처럼 펼쳐진다.   드라마와 같은 멋진 광경과 함께 햇살의 마지막 온기를 잠시 느낄즈음, 쭉 뻗은 도로가 눈 앞에 놓이는데 대부분 경험했던 장거리 로드바이크 여행이 그렇다.   


자동차들이 거침없이 달릴 수 있게 매끈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로 선명하게 그어진 희고 노란 줄을 따라 한 시간여 동안, 왼쪽 팔꿈치를 스치듯 내달리는 자동차들과 경쟁이라도 하듯 그렇게 달린다.   터널이라도 만나면,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터널 전체가 울림통이 되어 마지막 파워 페달링으로 부풀어 오른 장딴지 속까지 진동시킨다.   그곳을 조금이라도 빨리 벋어나려다보니 속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희열감은 로드바이크 라이딩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고 이처럼 중독성이 강한 행위도 드물다.


아직 해가 완전히 넘어가지 않았다.   바쁜 숨을 몰아쉬며 아침의 익숙한 지형을 다시 만나며 영월 스포츠파크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 아침에 들렀던 스포츠파크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간다.   한낮부터 땀을 그렇게 흘려보냈건만, 가을 늦은 오후의 찬 공기에 움츠러든 탓인지 뿜어 나오지 못한 열기를 그렇게 버리고 나서야, 오늘의 긴 여행이 끝났음을 안 근육들이 이완된다.   아침의 환했던 얼굴들은 마른 땀과 함께 눌어붙어 피로감에 일그러져 있지만, 그것이 좋아 늘 다시 찾으니, 이처럼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는 희열감은 로드바이크 라이딩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고 이처럼 중독성이 강한 행위도 드물다.   


하늘까지 올랐다 내려앉은 영월 자전거 여행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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