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라이딩, 거제도 자전거 여행

그 한국스러움에 반하다

1월2일 새벽 4시, 거제 고현에 도착했다.


그제 저녁 강화도 동막해변에서의 해넘이와 다음날 아침 동검도에서의 새해맞이 해돋이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해 첫 라이딩을 위해 어느새 거제도에 와 있다. 서울의 한겨울과는 달리, 영상의 온도와 연이은 맑은 날씨가 거제의 풍광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도 있었지만, 오랜 벗인 서양화가 박광수의 "그림정원"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벽을 여는 고현재래시장

잠에서 막 깨어난 몸의 낮은 체온 때문인지, 고현버스터미널의 공기가 찼다. 자전거 바퀴를 조립하고 미리 점 찍어둔 터미널 근처 사우나로 향했다. 날이 밝기까지는 세 시간 넘어 기다려야하고 라이딩의 첫 코스를 교통량이 많고 차량속도가 빠른 14번 거제대로를 거쳐야해서 어두운 시간은 피하고 싶었다. 한 동안 따뜻한 탕 속에서 몸을 녹인 후, 라이딩에 앞서 순대국으로 유명하다는 충남식당을 찾았다. 고현재래시장 안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미명의 고현시장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했다. 시장입구에 싱싱한 횟감을 대는 활어차가 도착해 분주하다. 안타깝게도 충남식당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자전거를 돌려야했지만, 새벽을 깨우는 고현시장의 활력 넘치는 모습에 기분조차 훈훈해졌다. 덕분에 일찌감치 문을 연 맛있는 돼지국밥 집을 만나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의 덕담까지 듣고 기분 좋은 라이딩을 시작한다.


거제의 아침은 유난히 일찍 시작된다. 섬의 경제를 떠받드는 조선소의 아침이 빠르기도 했지만, 24시간 문을 여는 국밥집과 뼈다귀 감자탕집들에 이미 손님들로 붐볐다. 시내를 벋어나 거제대로를 타고 서쪽 통영 방향으로 향했다. 거제의 주도답게 중앙분리대에다 대형차량들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바쁜 도로이지만, 견내량이 있는 섬 서쪽 끝자락을 가기 위해선 당분간 이 도로를 이용해야한다.

사동면
신거제대교
견내량

사나운 거제대로를 잠시 빠져나와 사동면 앞바다에서 거제의 바다를 처음 만나니 고요한 바다 위로 겹겹이 떠 있는 섬들이 아침 해를 한껏 안으며 한국의 바다를 말한다. 견내량에 도착해 남쪽으로 뻗은 견내량변 길(1018지방도)은 한결 자전거에 친화적이다.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동백나무 가득한 도로를 따라 조용한 시골 논밭을 지나치니, 거제의 겨울내음이 숨 속으로 빨려들어온다.


아름다운 거제, 그 한국스러움.


그 어느 하나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고서도 저 마다의 모습으로 겨울태양 빛을 되돌려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난다.

동백나무는 어린시절부터 친숙하다. 한겨울부터 꽃을 피우는 탓에 동백꽃을 보며 봄을 얘기하기엔 너무 이르지만, 따뜻한 남녘땅의 상징으로 동백꽃은 겨울과 따뜻함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겨울아침 햇빛을 받은 검푸른 동백나무 잎은 멀리서 보면 하얀 꽃을 피운 듯한 모습이다. 곧 저자리에 동백꽃이 피면 거제섬을 발갛게 물들일 것이다.

둔덕면 포구
둔덕면 포구
둔덕면 앞 한산도

동백나무들을 벗 삼아 남쪽으로 라이딩을 이어가다보면 곧 둔덕면에 다다른다. 조그만 포구의 모습에 이끌려 길을 내려가니, 평화로운 포구에서는 수면위로 반사된 아침 햇빛이 출항을 기다리는 어선 바닥을 쉴 새 없이 어루만진다. 그 뱃머리 넘어에는, 화도, 소록도 그리고 더 멀리 한산도가 동양화 처럼 거제 앞바다에 드리워져 있다.

가라산을 향하는 고갯길
지역 맛집이라는 바람의 핫도그
바람의 핫도그. 아침식사 이후 줄곧 에너지바에 의존하다 처음으로 지역 맛집의 명사를 만난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바람의 핫도그"

거제도 라이딩은 섬 도로의 험한 고도차로 잠시도 쉴 수 없다. 평지길 라이딩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업힐과 다운힐의 연속이다. 라이더들 사이에선 일명 "낙타등"이라고 하는데, 섬 전체를 낙타등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며, 거제면과 동부면을 차례로 지나 노자산(해발557)과 가라산(해발585)을 끼고 남부면으로 향하는 길은 길고도 높은 고도를 지녔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지만, 4.5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업힐이 자못 백두대간 이화령을 떠올리게 한다. 오르는 길이 있으면 힘든 만큼 그 내리막은 시원하고 즐겁다. 한겨울 땀에 젖어 긴 내리막을 따라 라이딩을 이어가다보면 어느덧 다대다포항이다. 총 130킬로미터의 세개 라이딩 구간 중 가장 긴 첫번째 구간(65킬로미터)을 마쳤다.

섬 남동쪽은 한려해상공원의 그 명성에 걸맞는 아름다운 풍광이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돌 때 마다 열린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빛은 비취색의 거제 앞바다와 맞닿아 바위섬들과 절벽을 감싸는데, 짐짓 듬성듬성 놓은 듯한 배들과 어우러진 모습에 페달링을 이어가지 못하고 틈나는 대로 자전거를 세운다.

학동몽돌해변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거제의 바다

흙바닥이 아닌 암벽을 감싸며 한시대를 넘어 자라온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 거제의 모습이자, 그 한국스러움에 감동한다. 바다와 하늘, 바위와 소나무, 동백나무들과 이들을 키워내는 거제의 땅, 이렇게 거제도를 누린다. 그 어느 하나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고서도 저 마다의 모습으로 겨울태양 빛을 되돌려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난다.


말을 듣지 않는 두 다리


아름다움에도 이유가 있고 그를 누리는 데는 그만한 값을 치르게 되는 모양이다. 절경의 남쪽 해안선에 놓인, 쉴 새 없이 오르고 내리는 해안도로의 강도 높은 변화가 체력을 빠르게 소진시킨다. 신선대를 지나 해금강 안쪽까지 돌아 나올 즈음 두 허벅지 근육에 피로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팔색조가 찾는다는 동백숲을 향하는 업힐
팔색조가 찾는다는 동백숲을 향하는 업힐

거리계를 보니 80여 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평지 위주의 라이딩에서라면 문제 될 만한 거리는 아니겠지만, 험한 거제도의 지형에 아침 출발 직후 부터 줄곧 혹사를 당한 허벅지의 이유있는 불평이다. 유명한 학동몽돌해변을 지나 팔색조가 찾는다는 동백숲을 향하는 업힐에서는 허벅지 앞쪽 근육에 첫 마비증상이 찾아와 잠시 쉬어야만 했다.

팔색조의 숲에 도착했다. 여름에 찾아드는 그 미조를 한 겨울에 만날 수는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20여년 전 부터 이 동백숲을 팔색조는 찾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낡았지만 예쁘장하게 단장한 간이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 화장실 내부엔 일(?)을 보는 이의 눈 높이에 맞추어 조그맣게 열려있는 창이 구조라항 앞에 있는 내도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바깥쪽엔 외도가 위치해 있을 것이다. 작은 간이 화장실이지만, 이를 만든 사람의 손길이, 잠시 머무는 이를 미소짓게 한다.

점심은 지세포 근교에 있는 강성횟집을 찾았다. 예전에 거제시내에서 맛있었던 성게비빔밥의 기억으로 같은 주문을 하고 지친 두 다리를 다시 주무르기 시작했다. 계획보다 1시간이 늦어진 오후 3시를 넘기고 있는데 한겨울 짧은 해에 그림자도 벌써 길어졌다. 장거리 라이딩에선 체력이 바닥나면 낭패다. 그래서 점심 전에도 열심히 간식을 챙겨 먹으며 칼로리를 보충해 왔지만, 두 다리의 통증은 예사롭지 않다. 휴식을 취해야하건만, 해가 진 후의 겨울 라이딩은 더 어려울 것이어서 멸치 젖갈을 한 입 물고 길을 재촉한다. 지세포의 간조에 맞추어 갯벌 바닥의 조개를 캐는 아주머니들의 손길도 바쁘다.

오늘 거제 라이딩의 세번째 구간이자 마지막 코스는 장승포를 지나 옥포조선소를 끼고 돈다. 한동안 우리나라 조선업의 불황과 거제도 경제 전체를 침체에 빠트릴 정도로 힘겨워하는 산업단지인지라 그 안에 있을 구조조정의 한탄스러움을 생각에서 떨쳐내기 쉽지 않지만, 대형선박들의 웅장함은 인상 깊다. 하루빨리 그 에너지와 활력이 되살아나길 기원해본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부터 불야성 같았을 옥포의 유흥가는 적막감만 가득하다. 미로 같은 길을 겨우 빠져나와 옥포공원을 향하는 길목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왔다. 저멀리 고개 정상에 옥포공원의 팔각정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500여 미터의 높은 경사가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힘찬 페달링을 저어 보지만, 중간 즈음에서 이번엔 허벅지 뒤쪽 근육경련이 찾아왔다. 다행히 중턱 즈음에 10여미터 정도의 평지를 이용해 자전거를 세우고 경련이 풀릴 때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라며. 그러는 사이 해는 모습을 감추고 가로등과 차량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 지도앱을 열어 이리저리 손가락을 놀려보지만, 떨어지는 온도에 손만 시려울 뿐이다.

다시 오른다. 경련을 일으켰던 근육을 최대한 쓰지 않고 다른 쓸만 한 근육을 사용해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포기를 해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랫배부터 가슴까지 차오르는 긴장감에 그나마 남아있던 근육의 힘이 풀어져버린다. 공원 팔각정 아래에 거의 다다를 즈음, 다리는 다시 경련이 일었고 정상이라고 여겼던 곳에서는 "ㄱ"자 모양으로 100여미터의 오르막길이 좌측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계속 페달링을 해보는 수 밖엔.


벗과 함께하는 장목항의 생굴


해가 떨어진 후여서 이제는 달리는 것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김영삼대통령생가 400미터"라고 쓰여진 갈색 도로표지판이 땅거미와 함께 본 마지막 도로표지판이었던 듯하다. 130여 킬로미터 코스가 끝나는 마지막까지, 고개길들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마지막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또 다른 고개길이다. 완전히 어둠이 깔리고 장목항 어귀 마을 불빛과 해변도로에 이어지는 차량을 보고서야 마지막 고개를 넘었음을 깨닫는다. 네온 간판 불빛들이 그리도 반가울 수 없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그림정원"을 앞둔 마지막 갈림길에서 지도를 확인하자니 포구 마을 수퍼마켓이 눈에 들어온다. 곧 이 갈증과 피곤함을 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푼다.

오랜 벗과 만나 생선회에 소주 한잔 기울이니, 온 몸의 피로감은 사라지고 노곤한 기쁨이 약기운 퍼지듯 온 몸 구석구석을 온기로 채운다. 지난 주, 해를 넘기기 전 2017년 마지막 전시회를 마친 거제 생활 11년차의 화가는 생굴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굴을 좋아하는 자전거 타는 친구에게 거제도 굴구이 맛을 보여주려다 연초에 문을 연 식당을 찾지 못해 볼락회와 따라나온 생굴 한 줌으로 대신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한겨울 거제의 생굴이라지만, 생굴이 이렇게 달콤한 것은 처음이다. 거제 뱃사람들이 먹는다는 지리도 함께 뜨며 거제도 자전거 여행과 그림 이야기로 잔을 부딪는다. 이번 거제도 자전거 여행은 인생라이딩이다.


끝.



거제도 라이딩 코스 팁


1. 섬의 풍광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해변을 끼고 라이딩 한다.


2. 초-중급 라이더들에겐 짧고 굵게 남동코스.

다대다포항 - 구조라항 구간의 약 25여 킬로미터(해금강 왕복 포함)를 포함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거제를 대표하는 경치와 해안 고개길은 40~50킬로미터의 시간과 운동효과를 갖는다.


3. 고현터미널에서 시작하는 라이딩이라면, 거제대로 라이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읍내로"를 이용한 코스로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다. 읍내로는 사곡리와 거제면을 잇는다.


4. 근육경련을 예방하기 위해선, 전해질이 풍부한 음료(스포츠음료)를 이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 외엔 자주 쉬면서 마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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